[아! 대한민국-55] 파독 광부와 간호사
[아! 대한민국-55] 파독 광부와 간호사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3.12.2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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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1961년 12월, 한국정부가 독일에 파견한 ‘차관교섭 사절단’은 천신만고 끝에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는데 성공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한 달 앞서 5.16군사정권은 케네디 미국 정부를 찾아가 원조를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뒤였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지급보증을 해 줄 은행이 없었다. 그때 독일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있는 사람이 사절단을 찾아왔다. “지금 서독에는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광산은 지하 1000미터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가려고 하는 근로자가 없다. 혹시 한국에서 5천명 정도를 보내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가 모집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미치질 못했다. 1차로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대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했지만,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졸업자였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가짜 광부였던 것이다.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1000미터 이하의 갱도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는 광부도 있었다. 쉬는 날에는 주택 철거 등 잡일을 했다.

이렇게 죽자사자 번 돈을 거의 모두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 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 226명이다. 이들이 연간 조국에 송금한 돈은 5천만 달러로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의 2%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 돈은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닦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산업을 일으키는데 시드머니가 되었다.

2013년은 서독 광부 파견 50주년이었다. 지난 2013년 5월에는 양재동에 파독 5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회관 건립행사가, 그리고 12월에는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건물)에서 그 기록물 전시회가 있었다. 그리고 독일 뒤셀도르프를 비롯한 관련지역에서 기념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사기초청 문제도 불거지는 등 안타까운 일도 많은 파독 50주년 기념행사였다. 그들도 이제 조국에 와서 쉬고 싶다. 그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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