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 최초의 한인정착촌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 최초의 한인정착촌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3.12.2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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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2014년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고려인의 이주사를 연속 게재한다. 본지가 소개하는 고려인 이주사는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센터장 임영상)가 2004~200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을 수행한 결과물이다. 당시 사업은 ‘러시아 고려인 140년 이주 개척사를 소재로 한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됐으며, 총 34개의 원형스토리가 담겨 있다.[편집자 주]

대상: 최초로 연해주 지신허에 정착한 한인들
시기: 1863-1864년
공간: 지신허 마을 등 포시에트 구역
등장인물: 최운보, 양응범, 코르사코프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 레쟈노프 중위

▲ 고려인 강제이주 경로지도

함경북도 경흥지방의 어느 두메산골.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겨울밤. 온대지가 꽁꽁 얼어붙고 두만강은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각종농기구와 세간도구 등을 둘러메고 강어귀로 모여든다. 그중에는 최운보와 양응범이도 있다.

모두가 앉아서 관헌들에게 시달리다 기근에 굶어 죽느니 차라리 월경을 하고, 두만강 넘어 땅에서 죽겠다는 각오다. 모두 10여명은 넘어 보인다. 여름에는 넘치는 물로 세간도구들을 가지고 건널 수가 없기에 겨울이 도강하기에는 최적의 시기이다. 가축도 몰고 갈 수가 있다.

강을 마주한 양국의 국경수비대원들 또한 심한 추위에 잠들어 있기 일쑤다. 최운보와 양응범은 이미 지난해에 러시아 땅을 밟아보고 농사짓기에 좋은 곳을 둘러 본 경험이 있었다.

다행히 조선 측 초소수비병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꽁꽁 언 두만강을 10여명의 무리가 건너기 시작한다. 모두가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감과 잡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의 전율이 온다. 하늘이 도우려는지 러시아 측 국경수비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포시에트 지구까지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모두가 지쳤지만 곧장 도보로 하루 종일 포시에트지구까지 내 걷는다. 길 양편에 눈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땅에 모두가 할 말을 잃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이 주인으로 있던 땅이었기에, 아직은 노랑머리에 코가 긴 러시아인들도 없다.

인적이 드물다. 마침내 바라노프카강과 지신허 강이 흘러 들어가 만나는 곳에서 일행은 발걸음을 멈춘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중국국경이 있다. 마침내 계봉우선생이 표현한 것처럼 러시아 ‘신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이튿날부터 여인들은 각종농기구와 세간도구, 옷가지 정리로, 사내들은 임시라도 거처할 수 있는 통나무로 된 움막집을 짓는데 부산하다.

봄에 쓰기 위해 힘들게 가지고 온 농기구들을 한 켠에 잘 두고, 주변의 나무들을 이용하여 제법 그럴듯한 통나무 움막집을 만든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마침내 봄을 맞이한다. 잘 보관해 두었던 농기구를 이용해 돌을 골라내고 밭을 일구고 씨(옥수수, 수수, 조)를 뿌린다. 비옥한 땅이어서 곡식들은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적어도 머리길이 만큼씩 키가 크고 시커먼 외투에 기다란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병사들이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근심스런 마음으로 하나둘 러시아 병사들 앞으로 모여들었다. 타국에서 이제는 이렇게 잡혀가서 죽게 되는구나 하고 모두들 두려움에 떠는 눈빛이었다. 다행히 병사들의 얼굴은 그리 험악해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 가운데에 고참격인 병사가 있었다.

바로 노브고로드 경비대 레쟈노프 중위이다. 최운보는 두만강을 건너올 때처럼 용기를 내어 앞에 나갔고, 손짓발짓을 통해서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최운보는 러시아 수비대병사들에게 “주변에 마적 떼들이 있어서 무서우니, 이 지역을 정기적으로 수비해줄 병사들 5~6명만 보내주면, 100가구 이상이 더 이곳으로 이주해 올 것이며,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이라고 요청했다.

랴자노프 중위는 카자케비치 연해주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1863년 11월 20일자 보고서, No.205), 이후 지신허 마을 사람들의 수는 늘어갔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불법월경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정부는 조선인들의 입국을 묵인하는 러시아정부에 강하게 항의를 했고, 1864년에는 급기야 김홍순과 최수학, 2인이 러시아인과 통첩했다는 죄목으로 조선정부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불법 월경하는 조선인들을 바싹 긴장시켰다. 그렇지만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불법이주를 막을 수는 없었고,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주 초기에 러시아당국은 이주에 유리한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기도 했다. 1861년의 ‘러시아 이민법(무라비요프 이민법)’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건립(1860)하며 이민 장려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초기 한인들의 연해주이주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코르사코프(М.С.Корсаков, 1861-71)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는 1864년 11월16일자 지시로 한인들을 보호하고 정착에 필요한 식료품을 지급할 것을 연해주지사 카자케비치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이런 조치들은 한인들의 연해주이주에 촉진제로 작용했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계봉우가 “단기 4197년(1864) 갑자(甲子) 봄에 최운보와 양응범이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내주하여 개척을 시작하니, 이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견줄 만하다”고 평했던 것처럼, 지신허마을은 독립국가연합지역 한인사회의 첫 장을 열어놓은 곳이다.

1864년 여름 지신허강 유역에는 이미 한인 30가구(140명)가 거주하고 있었다. 지신허강 유역에 지신허마을이 생긴 이후, 시디미강과 얀치헤강, 파타쉬강 등을 따라서도 한인들의 정착이 시작되고, 강 이름과 동일한 마을들(시디미, 얀치헤, 파타쉬, 아디미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주 한인들은 주변의 다른 토착원주민들과는 섞여 살지 않고, 적게는 대여섯 가구에서 수십 가구씩 넓게 흩어져서 거주를 했다. 지극히 평온한 삶이 지속되었다. 이주자들의 땀으로 비옥한 농토(밭)가 가꾸어졌고, 매해 농사는 먹을 것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결실이 좋았고, 어느 마을을 가던지 연자 맷돌이 돌아가는 방앗간과 우물, 당국의 지원으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지신허, 아디미마을 학교)가 세워졌다.

1867년경에 이주자 수는 지신허마을을 중심으로 약 185가구(999명)까지 증가했다. 한인들의 계속된 이주로 연해주 남부의 포시에트지구는 한인정착촌으로 채워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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