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 정교회 개종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 정교회 개종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1.0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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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2014년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고려인의 이주사를 연속 게재한다. 본지가 소개하는 고려인 이주사는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센터장 임영상)가 2004~200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을 수행한 결과물이다. 당시 사업은 ‘러시아 고려인 140년 이주 개척사를 소재로 한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됐으며, 총 34개의 원형스토리가 담겨 있다.[편집자 주]

대상: 정교회 세례를 받는 한인들
시기: 1865년
공간: 포시에트 지구 지신허 마을
등장인물: 최운보, 프르줴발스키, 마을 사람들

1856년 종무원은 아무르지역의 이민족들에 대한 공개적인 정교회 선교를 허가했다. 이후 한인이주와 더불어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 주교에 의해 한인에 대한 정교회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앞서 인노켄티 주교는 아무르강과 제야강 유역의 골드족과 길랴크족 같은 이민족들 내에 선교지부를 열었다.

러시아당국은 극동지역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들의 존재를 중요시 여기며,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러시아화가 필수적이라 보았다. 일찍이 1867년 연해주 남부지역을 여행하며 지신허 마을을 방문한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프르줴발스키는 “러시아정교회는 우수리지역의 한인과 기타 이민족들의 정신적 쇄신과 러시아화를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되어야 한다”며, 정교회를 통한 이민족들의 러시아화를 강조했었다.

하지만 초기에 정교회를 통한 이주 한인들의 질적인 기독교화는 그다지 쉽지 않게 진행되었다. 1860년대 말까지 한인세례는 지역사제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 졌다. 그러나 사제들의 수는 부족했으며, 이는 선교활동을 느리게 진척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최초의 선교사들은 발레리안(Валериан, 1865-70)수도사와 자하리 티아프킨(З.Тиапкин)이다. 발레리안 사제는 우니아트(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혼합형태) 교회에 속해 있어서 공식임명을 받지 못한 선교사였다. 그럼에도 발레리안은 연해주 포세트지구에 들어와 한인들 사이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발레리안은 열악한 토착민 선교활동 속에서도 포시에트에서 올가지역까지 선교순회를 하며 한인을 포함한 토착민들에게 정교신앙을 전했다. 발레리안의 신앙적인 열정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평온하던 어느날 지신허 마을을 술렁이게 만드는 일이 발생했다. 검은 옷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십가가 모형의 성물을 목에 두른 정교회사제가 러시아인 관리와 함께 지신허 마을을 방문했다. 사제와 관리는 한인들에게 세례를 받을 것을 권했다.

관리는 한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아야만 러시아 국적을 받을 수 있고, 토지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속신앙적이고 불교적인 정서를 갖고 대대로 살아온 한인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노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마을사람들 간에는 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의견을 달리하는 자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반목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을의 민심이 갑작스레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마을이 들어선 이래로 가장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후 지신허 마을 촌장 최운국이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나섰다.

1865년 1월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서 마을 촌장인 최운국(세례명 표트르 세묘노프)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곧바로 두 가정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하나둘씩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험악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마을의 민심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평생을 농사를 지어온 한인들로서는 토지를 부여받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정교회 세례를 받고, 러시아 국적을 받은 자에 한하여 토지가 분여되었다. 한인들은 싫든 좋든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점차 주변 마을들로 퍼져나갔고, 세례를 받는 한인들의 수가 늘어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1867년 연해주 남부지역을 여행하던 프르줴발스키가 지신허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은 많이 변해 있었다. 지신허 마을 촌장인 최운국(48세)은 프르줴발스키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눌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프르줴발스키를 여기저기 안내했다.

최운국은 1865년 세례를 받은 후 머리와 복장을 러시아식으로 하고, 러시아식 농가에서 살고 있었다. 프르줴발스키는 이틀동안 지신허 마을에 머물렀으며, 최운국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프르줴발스키는 최운국에게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그 등의 큰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최운국은 프르줴발스키에게 모스크바를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최운국은 이틀동안 프르줴발스키가 가는 곳마다 안내해주며 마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틀 후 프르줴발스키는 떠났다. 최운국은 마을 어귀까지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해 발레리안 사제는 한인 10명에게, 이듬해에는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69년 8월 발레리안 사제는 사망한 자하리 티아프킨 선교사를 대신해 연해주 남부지역으로 완전히 옮겨왔다. 발레리안은 얀치헤마을에서도 한인 14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추가로 주변 마을 13명의 한인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1869년에 포시에트 지구의 한인 세례자수는 91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선교사와 지원부족으로 세례 받은 한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신앙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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