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 축복받은 마을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 축복받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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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1.1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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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의 이주에 대해서 러시아 측이 우호적인 입장을 견하고 있었음에도, 1860년대 초기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인들의 이주와 고립적인 생활방식은 러시아당국의 우려를 야기시켰다. 1860년대 후반(1867-69) 남우수리스크지역을 돌아본 여행가이자 극동 및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프르줴발스키는 한인들은 러시아인 농민들과는 떨어진 국경지대에서 독립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거주, 이들의 빠른 러시아화를 위해서는 한카호수와 수이푼강 사이의 부근이나, 러시아인 정착촌으로 이주시켜, 정교신앙과 러시아 관습 등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국경에서 먼 내륙으로 재이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 시각은 러시아 당국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71년 여름 마침내 시넬니코프 동시베리아 군사령관지사는 러시아국적을 받은 한인 103가구(431명)를 아무르주의 사마라강 유역에 재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지시에 따라 아무르주지사 페다쉔코는 한인 80가구를 기준으로 주택에 건축에 필요한 목재와 연장, 건축재료, 한인들이 자립할 때까지 지급할 15개월분의 식량, 농사에 필요한 가축 등에 대한 필요한 예산을 미리 산출했으며, 그 비용은 총 15271루블이 소요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외에도 한인들은 1861년 4월 21일자 No.36928호 원로원령에 의거하여, 러시아인들과 나란히 인두세 영구면제, 20년간 토지세 면제, 3년간 부역 면제혜택을 받았으며, 이주 직후에는 개종과 더불어 러시아국적을 받고 가구당 100데샤티나의 토지를 분여받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마침내 1871년 7월 말 연해주 남부 지신허마을의 박도언, 지하진(미하일)이 인솔하는 65가구(남자-157명, 여자-129명)와 얀치헤마을의 촌장(읍장) 박선옥(니콜라이)이 인솔하는 38가구(남자-89명, 여자-56명), 총 431명의 한인들이 카자크부대 랴비코프 대위의 인도에 따라 새로운 이주지로 향해 출발을 했다. 한인들의 여정은 멀고 멀었다.

처음에 한인들은 흥개호(興凱湖/한카호수)를 끼고 화발포(花發浦/하바로프스크)까지 걸어갔으며, 화발포에서 흑룡강(아무르강)을 따라 기선 ‘우수리호’에 의해 견인된 2척의 바지선을 타고, 1871년 7월 27일 마침내 사마르강가의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 카자크 마을에 이주되어 왔다. 집이 완성되기까지 한인들은 카자크마을에서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 카자크마을의 카자크인들이 한인들을 도왔다.

무엇보다도 보금자리를 꾸미는 일이 급선무였다. 1871년 7월 하순경에 이미 4천394개의 통나무가 사마라강 하구로 이송되었으며, 블라고베쉔스크에서는 식량과 말, 다양한 건축재료들이 기선을 통해서 푸지노(Пузино/현재 예카테리노-니콜스코예마을) 카자크 마을로 이송되어 있었다.

한인들과 카자크인들의 빠른 손놀림으로 8월 말경에는 20채의 통나무 건물과 2채의 작은 농가, 11월 무렵에는 25채의 통나무 건물과 6채의 작은 농가가 지어졌으며, 학교와 목조 교회의 초석이 놓여졌다. 이후 총 53채의 큰 통나무 건물이 세워졌다. 주택들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건축재료 및 인력, 관련 부속물들에 대해 소요된 비용은 실로 막대했다.

통나무 8000개, 목재 부송인력-카자크병사300명(보수로 통나무 지급-1개당/20코페이카), 유리는 가구당 24장씩(1장-15코페이카), 총 288루블, 함석은 가구당 반장씩(1장-3루블) 총12루블, 쇠막대는 가구당 반푸드씩(1푸드-8루블) 총 320루블(전체총액 720루블), 도끼 80개(1개-2루블, 총160루블), 둥근톱 10개(1개-6루블, 총60루블), 활톱 10개(1개-60코페이카, 총6루블), 일반톱 10개(1개-4루블, 총40루블), 줄 3다스(1다스-5루블, 총 15루블) 등이 소요되었고, 결과적으로 건축비로 1가구당 34루블 50코페이카가 소요되었다.

이외에도 아이가 있는 한인 가정에는 15개월동안 총 8,100푸드의 곡물(부다(буда)-4,000푸드/밀가루-4,100푸드)을 제공, 총 7,700루블이 제공되었다. 또 1872년 봄에 파종 종자용으로 부다(буда) 5푸드씩과 봄보리 6푸드씩, 모밀 5푸드씩, 귀리 7푸드씩이 각 가정에 공급되었다(부다(буда) 1푸드-70코페이카, 봄보리-70코페이카, 메밀과 귀리-50코페이카씩). 한 가구당 14루블 90코페이카, 80가구에 총 1,192루블이 지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구당 말과 소 1마리씩과 농사에 필요한 연장과 농기구, 의복(러시아식)과 기타 농업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는데 적어도 25루블씩이 지원되었다.

이듬해인 1872년 사마라강 유역에 블라고슬로벤노예(사만리) 마을이 세워졌다. 첫해농사가 실패하여 한인들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당국의 지원으로 위기를 넘기고 비옥한 토질 덕분에 마을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한인들의 아무르주 이주는 러시아정부 주도 하에 이루어진 모범정착촌 건설이라는 전무후무했던 재이주정책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재이주는 재정적 부담으로 이후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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