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7번국도 아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8)
[특별연재 ‘7번국도 아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8)
  • 김전한<작가·동아방송대 겸임교수>
  • 승인 2014.01.15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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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범위는 끝 간데가 없다. 머리방, 노래방, 찜질방, 남성휴게방, 키스방. 안마방. 전화방, 디브디방, 만화방. 아아 그중에서도 만화방, 지금은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만화방. 숱한 방들 중에서 그 시작은 역시 만화방이다. 70년대 만화방 뒤 켠 쪽방엔 텔레비전 방도 있었다. 입장료 5원, 매상실적 좋은 고객은 무료로도 가능했던.

여름날 초저녁. 아이들은 그 쪽방으로 몰려들었다. 발 냄새, 땀 냄새, 닦지 않은 입 냄새들로 방안은 가스폭발 직전이었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사각속의 원, 원 속의 사각, 기하무늬의 화면조정시간이 지나고 애국가가 장엄하게 흘러나온다. 우린 모두 일어나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경건하게 밀착시킨다. 애국가가 끝나고 오늘의 방송순서가 자막과 함께 밀려 올라온다.

배경 화면은 북유럽쯤으로 짐작되는 눈 덮인 산악지대다. 성 같은 집들이 드문드문 있고 금발의 선남선녀가 스키를 타고 산 아래로 깊숙이 활강을 한다. 슬로우 모션으로 나비처럼 날아가는 스키어. 선남 선녀는 성과 같은 집으로 들어가고 화면 위로는 방송순서가 계속 밀려나온다. 실내로 들어선 백색의 선남 선녀는 벽난로 앞의  카펫에 앉아 서로의 어깨를 살포시 기댄다. 여자의 포근해 보이는 털스웨터에 보풀이 보슬보슬 피어오른다. 보풀너머 뽀얀 여자의 목덜미가 클로즈업 되고. 방송순서 타이틀이 시작될 때부터 배경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갸르르르르 손가락을 움직여 감미롭게 뜯어내는 기타소리. 창 너머엔 여자의 목덜미보다 더 뽀얀 눈송이 펑,펑,펑...쏟아져 내리고. 기타 소리는 더욱 갸르르 거리면 절정으로 치닫고. 어린 나의 얼굴은 땀으로  끈끈 번들거리고 쪽방 안은 끓고 있는 압력 밥솥이 된다. 그래도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빡빡머리 아이들. 그래도 눈빛만은 초롱초롱 했던 아이들. 북 유럽의 그 설경에 젖어들던 아이들. 텔레비전 속의 남녀는 현실 속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 금발의 남녀가 인간이라면 우린 짐승이거나 바퀴벌레 무더기가 된다. 그러니 그 속의 남녀의 인간일 수가 없다. 그리고 또 그 소리, 갸르르르르 거리는 그 기타소리. 고요하고 잔잔하게 울리는 저 천상의 소리.
 
훗날,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채널 93.1을 열었는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이라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 불현듯 아 바로 이 음악이었구나. 그때 그렇게 갸르르르거렸던 바로 그 울림. 알함브라는 스페인이 아니라 북유럽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 였구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 유구한 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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