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그림편지-2] 대보름, 겨레의 대축제
[김봉준그림편지-2] 대보름, 겨레의 대축제
  • 김봉준 <오랜미래신화미술관 관장∙작가>
  • 승인 2014.02.1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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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들당산(목판화. 대보름축제. 우주목 의례굿)>, (오른쪽)<길놀이(목판화. 대보름축제)>
▲ 김봉준 관장

언제부터 대보름만 되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오금이 출렁거리게 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맘 때만 되면 슬슬 어깻죽지가 펴지고 광에서 장구와 북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두드리던 오랜 버릇은 언제부터 시작 된 것일까? 일 년 중 가장 많은 놀이판이 벌어지고 일 년 중 가장 큰 규모의 축제가 펼쳐졌던 코리안의 대축제, 대보름은 어떤 의미인가?

동학농민혁명, 3.1운동이 대보름 축제와 관련 있는 것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발흥지가 부안 백산 인 데 대보름굿판에서 시작한 것을 아는 이 적다. 무엄하게도 탐관오리를 물리치자고 죽창을 들었던 백성의 저항이 축제에서 시작한 것이다. 집단 신명은 사람의 마음을 한 것 크고 자신감 넘치게 하여 감히 넘볼 수 없는 조선 왕조의 위엄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3.1운동 역시 대보름 문화와 관련 깊다. 한반도 곳곳 장터마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민족 최대의 항쟁 역시 대보름을 ‘저항의 축제’로 변환시킨 것이다. 축제는 본래 자기 긍정과 평화의 문화인지라 3.1운동에서도 평화행진이 자연스러웠다. 한반도 각지에서 일제가 폭압적인 탄압을 해 왔어도 줄기차게 만세를 외치며 당시 노랫말처럼 ‘춤추며 싸우던 형제들’이 되었던 것은 대보름문화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일 년 중 가장 많은 놀이와 축제가 일어났던 때가 대보름이다. 새해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해맞이 길흉화복의 점을 마을단위로도 보았으니 줄다리기를 하며 마을 사람은 합심을 구하였다. 암줄 수줄로 나뉘어 패를 나누고 이기는 쪽 마을이 풍년 든다고 하였다. 석전놀이, 횃불싸움, 윷놀이 등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점치는 예감이 번득인다. 감성놀이는 기분 좋은 예감을 만든다. 대보름 척사영복斥邪迎福 놀이는 새해 새 농사를 협동으로 시작해야 하는 마을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요긴한 단합행사였다. 산다는 것- 경제는 심리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대보름 축제는 거대한 상징의미가 숨은 듯 들어나 있다. 빛은 어둠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집단무의식으로 내려오는 문화적 질서이다. 문화적 법칙 같은 것이다. 조선 후기 전국에 펼쳐졌던 탈춤을 보면 어둠이 빛에 의해 쫓겨 나가는 탈판 구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노장과 취발이, 상양반과 말뚝이, 미얄과 각시의 극적 갈등도 기본적으로 어둠과 빛의 갈등구조이며 우여곡절을 겪지만 빛이 어둠을 반드시 이긴다.

겨울과 봄, 늙음과 젊음의 싸움에서 봄과 새것이 겨울과 낡은 것을 이기는 생명의 법칙을 따른다. 새 생명의 상징은 빛이다. 심지어는 비극적 결말이라 해도 희망의 빛을 찾는다. 미얄은 봉건시대 남권주의 지배질서의 희생자이지만 탈춤은 미얄의 죽음에서 다시 부활을 찾는다. 미얄 장례의식은 당대를 성찰하며 새로운 시대로 행진하는 축제로 마무리한다. 참가자 모두가 동참하여 미얄의 죽음 상여 길을 부활의 빛 길로 바꾼다. 이것이 진정 축제의 힘이다.

대보름은 새해에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이를 상원上元이라고도 하는 데 대보름에 행하는 의례와 놀이를 통칭하여 대보름 마을굿이라 불렀다. 굿은 축제의 순 우리말이었다. 아랫녘 가면 지금도 노인들은 풍물놀이를 ‘굿 친다’고 부른다. 맨 처음 당숲에 가서 들당산굿(들어가는 당산굿)을 하고 장승굿을 하고 산 어귀로 올라가 윗 당산인 산신당 당고사를 지내고 다시 내려와 마을의 우물로 가서 샘굿을 하고 마을조상이 계신 입향제각에 가서 고사를 지내고 마을 공동곡간과 마을 다리밟기를 하고 난 후, 각 집을 돌아다닌다. 일종의 성지순례다. 여기서 문화공동체를 확인하는 의례와 마을 대동기금을 모았던 것이다.

각 집에서 문굿 조앙굿 성주굿 샘굿 철룡굿 곡간굿 외양굿 측간굿 마당굿을 차례로 치른다. 그리고 다시 마을 한마당으로 모여 달이 중천에 뜬 깊은 밤 달집을 태우며 소원성취 비손(의례)을 하였으니 이것을 대보름 지신밟기라 한다. 영남지역에서는 이렇게 불렀고 호남에서는 뜰밟이, 중부지역에서는 마당밟이라 불렀다. 종합 정리하면 지신밟기(마당밟이)는 마을신앙이며, 대지신화순례이며, 대동놀이이며, 예술제이며, 마을기금은행이며, 나눔 문화였다. 두말할 것 없이 지신밟기는 대보름 축제의 핵심이었다.

지금 대보름축제는 거의 다 사라져 가고 파편만 남았다. 부럼 까먹기, 겨우내 말린 나물밥과 오곡밥 해먹기, 가족들과 윷놀이 정도가 고작 이어져 온다. 가족 단위의 작은 이벤트에 그치고 있지만 우리 겨레 최대의 축제는 그렇게 쉽게 소멸하진 않을 것이다. 공동체문화의 뿌리는 잘 보이지 않지만 민간에서 민간으로 이어져 새봄을 기다린다.

대보름 축제는 언제부터 일까? 아마도 신석기 농경문화의 시작과 함께 하였을 것이다. 국가 형성 이전의 석기시대 문화이고 문화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을 잡아 줄 우리 겨레의 위대한 축제로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다.

대보름 축제는 코리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가? 흔히 ‘물보다 진한 것이 피’라고 한다. 그러나 피보다 더 진하게 있다. 오랫동안 동질성을 갖는 원천 원형문화(Culture Archetype)다. 신화와 언어와 놀이와 의례를 잃어버린 혈연만으로는 겨레의 동질성은 취약해 진다. 겨레의 대표적 문화정체성이 대보름 축제로 계승되어 왔다. 조상은 묻고 있다. 겨레문화 정체성 어떻게 계승할 것 인가.

▲ <대보름 마을축제그림> 대보름 마을축제가 펼쳐지기 시작하면 마을신화상징은 지신밟기 하는 치배들을 맞이한다. 풍물치배는 마을 신앙의 사제들이고 지신밟기 행렬은 일종의 이동식 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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