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8)
[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8)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2.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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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1) : 경주유산 입문(1)

불교의 나라, 신라

경주가 신라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신라가 터전을 잡기 전인 원삼국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주라면 신라를 의미하고 신라라면 불교국가로 부르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와 불국사, 석굴암도 기본적으로 불교 유산을 주축으로 했음은 물론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였고 발전하였지만 현재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불교 특유의 진리성 등에 의하여 어떠한 민족이나 국가에서도 그 민족 그 국가의 특수한 불교로 전환되는 것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태어난 불교를 한국불교라 볼 수 있다.

지금의 만주지방 일대와 한반도를 중심무대로 삼았던 우리 조상들은 여느 원시민족들과 다름없이 자연신(自然神) 숭배의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문화를 수반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

우리 조상들에게 불교는 말할 것도 없이 외래종교이지만 불교는 그 자체가 배타성이 없는 등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적합한 교리를 갖고 있으므로 종교를 갖지 못한 한민족에게 불교는 곧바로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특히 신라 왕실이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자 법문, 불상, 사탑, 사찰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면서 불교의 한국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경주를 답사한다는 것은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므로 답사에 들어가기 전에 기초정보인 사찰을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불상, 불탑을 다룬다.

최준식 박사는 “나는 불교도가 아닌데 불교에 대해 굳이 알아야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 박사의 답은 간단하다. 불교가 우리 땅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생활 속에 아주 깊게 침투해 있으므로 한국인이라면 자신이 여타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불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살고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과학유산답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이들에 대한 기초지식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실생활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불교의 교리 등 원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경주를 답사할 때 방문하는 불교 유적의 기본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그 범주에 불교 유적의 기본인 사찰, 탑, 불상이 포함되므로 이들을 연계하여 제일 먼저 사찰을 설명하고 이어서 탑, 불상을 설명한다. 이 글은 이창호, 곽동석, 방학봉, 박홍국, 강우방, 최준식 박사 등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음을 첨언한다.

<사찰의 기원>
중국에서는 사찰(절)을 흔히 ‘불사(佛寺)’ 또는 ‘사(寺)’라 불렀다. ‘寺’란 말은 원래 외교사절을 관장하는 관청을 뜻하던 것으로 인도의 중(스님)들을 홍로사(鴻盧寺)로 맞이하여 거주하게 했다. 다시 말한다면 ‘사’는 불교의 중(스님)들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일반 사원의 종류로 승가람과 아란야가 있다. 승가람이란 종합사원이라는 뜻으로 줄여서 가람이라 부르는데 ‘뭇스님들이 즐겨 머무는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가람은 예배·집회·포살(참회)·거주 등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종합 사원이다.

아란야는 일체의 번잡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즉 수행하기 좋은 한적한 수도처의 사찰을 의미한다. 선원(禪院) 또는 선방(禪房)의 뜻과 같다. 사찰이란 스님들이 거주하면서 수도하고 예배보며 교화하는 장소 즉 불교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과 스님에 대한 설명을 보자.

천하의 유학자인 율곡(栗谷)이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고 1년 동안 속세를 버리고 입산을 했다. 19살 때의 일이다. 당시는 불교를 배척하고 중을 천대했던 때라 그 선문(禪門) 1년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되어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왕따되기 일수였다. 문묘에서 공자에게 배례할 때도 따돌림 당하고 홍문관 교리 때에도 왕따를 당해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고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학계의 쟁점이 되었다.

‘중’이란 호칭을 싸고도는 이미지가 율곡같은 학문의 거인까지도 오염시켰다는 뜻으로 개화기 때만 해도 중은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하게 했을 만큼 천대했다. 그러나 중이란 말은 본래 좋은 뜻이다.

불교의 성직자를 뜻하는 범어의 ‘samgha’를 한문으로 옮길 때 음대로 승가(僧伽)라 했고 의역으로 ‘중’이라 했던 것이 그 뿌리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고대 불교에서 4명 이상의 비구가 화합하여 불사를 베풀었으므로 무리 ‘중’이라 불렀다 한다.

“숲을 이루는 나무를 낱낱 숲이라 이르지 않지만 그 낱낱의 나무 없이 숲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승을 집단적으로 파악 ‘중(衆)’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중이란 원래 중국 주나라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때까지 중이라 부르지 않고 복을 일구는 뜻으로 ‘복전(福田)’이라 불렀다.

승의 호칭으로 비구, 화상, 사문, 대덕, 법사, 선사 등 많으나 가장 이미지가 좋고 친근한 호칭은 존댓말인 ‘님’자가 붙은 스님이라고 이규태는 적었다. 스님이라는 말은 불사 측면에서 시자→시님→스님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일정한 규모의 사찰이 석가모니 생존 당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두 가지 절이 있었는데 아바사와 아라마이다. 아바사는 인도에서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비구승들이 다니면서 수행하거나 교화할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임시로 방을 만들어 사는 일시적인 승려 거주처이다.

아라마는 수도하기도 좋고 교화하기도 좋으며 보시받기도 편리한 도시나 큰 마을 주변의 한적한 곳에 일정한 대지와 승려가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이다. 이러한 아라마가 보다 확대되고 종합된 것이 승가람 즉 중원이다.

한편 탑은 일찍부터 세워졌지만 처음에는 승단과는 무관하게 일반 신도들이 탑을 조성하여 공양하던 것으로 처음의 가람에는 야외탑이 없었으므로 탑을 공경하는 예배 장소도 없었다. 그런데 일반 신도들이 공양하는 탑이 성행하자 가람에까지 탑을 봉안하게 된 것이다.

탑이 승원과 결합된 후 사원에서 차지하는 탑의 비중은 차츰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가람 구조를 설명할 때 배치 형식이 주요 관건인데 여기에는 탑의 존재 유무가 기본이다. 즉 탑이 금당(金堂)과 일직선상에 놓여있으면 일탑식 가람배치, 두 탑이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면 쌍탑식, 그리고 탑 하나에 금당이 3개 있을 경우 1탑3금당식 가람 배치라 부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탑이 승원에서 예배의 주 대상이 될 때부터 탑은 사원의 중심이 되었는데 불상이 예배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자 위상이 바뀐다. 불상을 봉안한 불전 즉 금당도 탑과 같이 중요시되어 탑·금당이 병립하기 시작하더니 불상이 불교신앙의 주체로 등장했다.

당연히 금당이 주(主)가 되고 탑은 종(從)이 되는 사원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가람에 반드시 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 말부터 특히 산지가람에서는 탑이 없는 배치가 나타나다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탑이 사원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외곽지대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불전의 종류>

 
사찰에는 부처를 봉안한 여러 불전들에서부터 강의를 위한 건물, 참선하는 건물, 승려들이 거주하는 건물은 물론 식당, 부엌, 종루, 고루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쓰임새에 따라 분리되어 건설된다.

그런데 많은 사찰을 방문하다보면 각 건물들이 거의 유사한데도 불구하고 건물의 현판을 보면 완연히 다른 이름을 갖고 있어 헷갈리기 마련이다. 이는 사찰 나름대로 기준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경주 답사는 물론 한국에 산재한 일반 사찰 등을 방문할 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므로 사찰의 기본에 대해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소개한다.

① 일주문
대형 사찰에 들어설 때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사찰의 위용을 한 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한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불도를 닦는 사람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와 진리를 생각하면서 일주문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도 일주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두 기둥을 일직선상에 세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주문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다포양식(고려 후기인 13세기 말~14세기에 원으로부터 전래된 양식으로 조선 시대에 성행했으며 주두(柱頭)와 기둥 사이에 두공을 둔 것을 말함)의 공포로 구조하여 윗부분이 지나치게 과중해지는 가분수인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말은 건축적으로 다포계 공포 구성이 채택되고 유행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주문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과거에는 일주문이 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중문
일주문 다음에 나오는 것이 금강문(金剛門)으로 집으로 치면 대문이다. 금강문이 없는 사찰에서는 바로 사천왕문에 도달하기도 하는데 격으로 보면 사천왕문은 중문에 해당한다. 금강문에는 금강역사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상 네 분이 좌우에 있다.

이들은 팔부신중이나 십이지상과 더불어 법을 호지(護持)하고 도량을 수호한다. 불국사에서 대웅전 일곽으로 들어가는 자하문과 극락전으로 들어서는 안양문도 중문이다. 사천왕문이 없는 사찰에서는 중문으로 회전문(廻轉門)을 세운 경우도 있다. 청평사 극락전 앞에 있는 중문이 회전문(보물 제132호)이고 도갑사의 해탈문(국보 제50호)도 회전문에 속하는데 성격상 이곳에서는 중문보다는 대문으로 간주된다.

③ 대웅전, 대웅보전
일주문과 중문을 지나면 각 사찰의 보궁으로 들어가는데 보궁의 이름은 어느 부처를 모시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대웅보전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본존불을 모신 중심 전각을 ‘금당’이라고 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법문을 설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법당’이라고 했다.

‘대웅’이란 말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큰 영웅인 대웅으로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의 협시불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상이 안치된다.

대웅전은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힌 위대한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가람의 중심 건물이다. 삼신(三身)을 하나로 보는 생각으로 수덕사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품이 남아있으며 봉정사의 대웅전에는 앞에 난간으로 쪽마루를 설치한 흔적이 있다.

한편 부처의 진신사리를 갖고 있는 사찰에서는 불상을 갖지 않는다. 신라의 자장법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갖고 와 황룡사 탑과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 불단에 나누어 봉안했으며 추후에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오대산 월정사(5대 적멸보궁) 등 ‘5대적멸보궁’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의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가자 선조38년(1605)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이를 되찾아 금강산 건봉사에 봉안했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6대적멸보궁’이 한국에 있다. 이들 사찰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 이유는 부처의 진신사리에 예불을 드릴 수 있으므로 구태여 불상이 있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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