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41] 다 같이 못 살 수는 있어도 다 같이 잘 살 수는 없다
[삼강만평(三江漫評)-41] 다 같이 못 살 수는 있어도 다 같이 잘 살 수는 없다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4.03.0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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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돈 100 달러가 있는 빈곤층 80명, 1천 달러를 가진 중산층 18명, 1만 달러를 소유한 부유층 2명이 있다고 하자. 그들의 돈을 합쳐 골고루 나누면 1인당 460 달러가 돌아간다.

산술 계산을 이렇게 하면 맞을지 몰라도 인간의 경제활동을 이렇게 단순히 평준화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1인당 액수가 460  달러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의 한 교수가 이런 파격적이고 조금은 엉뚱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개별적인  성적을 그 반 전체 학생 성적의 평균치로 똑 같이 매기면 어떠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동의하자 그대로 실행했다.

첫 번째 시험의 평균치가 B학점이어서 모든 학생에게 B를 주었다. 상대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한 애들은 불평했고, 더러 게으름을 피웠던  애들은 좋아했다. 두 번째 시험의 평균치는 C학점이었으므로 학생들은 똑같이 C를 받았다. 그 때부터는 열심히 하던 애들도 공부를 등한히 했다. 세 번째 시험의 평균치는 D학점, 네 번째 시험의 평균치는 F학점… 결국  반 전체 학생의 학기말 성적은 애초의 평균치 B가 아닌 F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바마의 복지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지어낸 우스갯소리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 체제 건설 전 과정을 지켜본 필자는 상기 학점 변화와 같은 체험을 진짜 많이 해봤다.

필자 고향의 농촌은 약 40세대가 1개 생산대이며, 10개 생산대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58년부터 고향 마을도 정부 정책에 따라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했고, 10개 생산대가 연말에 평균치로 1년 노동성과를 배분받는 방식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일하는 시간부터 당장 달라졌다.  그 이전 농번기에 농민들은 대략 새벽 5시 전후에 일을 시작했다. 점심 때  1시간 반 동안 밥을 먹고, 저녁 8시에야 일을 끝낸다. 그런데 이렇듯 평균치로 배분하자 생산대마다 아침 8시, 오후 3시에 일터에 나갔다. 남들 보는 눈이 있어 더 늦게 일터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일터에 나가서도 서로 힘을 내지 않는 경쟁을 벌인다. 심지어 호미나 낫을 손에 쥐고 일하는 흉내만 내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5년이 지난 1962년이 되자 전 중국의 농촌은 황폐해졌다. 가을에 거둔 수확물은 곡식 반, 풀 반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연말 수입은 10개 생산대의 애초 평균치 3분의 1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중국의 농촌은 이미 당시 사실상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빠졌다.

1972년 필자가 근무하는 군부대 1개 대대는 길림성 장춘에 있는 제 1자동차공장에 가서 계급투쟁을 1년 벌인 적이 있다. 5만 명의 근로자가 1년동안 목표로 삼았던 5만 대의 자동차도 생산하지 못한데 따른 응급처방 격이었다. 계급투쟁을 하여 생산성을 올려보자는  취지였다.

 계급 투쟁 전 이 공장의 근로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일을 안 하거나 적게 하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번갈아 갱의실에 가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돌아오는 몫이 같으므로 차라리 남보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급투쟁 기간에 군인들은 본보기로 한 사람을 영창에 넣었고, 수백 명을 징계했으며 모든 근로자에게 반성문, 보증서 등을 쓰게 했다. 이런 식의 계급 투쟁 결과 그 해 연말에는생산 목표를 1주일 앞당겨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군부대를 철수한 후 상황은 이전처럼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사회주의 체제 중국의 실상이었다. 비단 중국 뿐만 아니라 10여 개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특히 경제 배분의 면에서 평균주의는 그 1인당 소득을 점점 전체 평균치 이하로 떨어지게 만든다. 지금 북한의 1인당 GDP는 한국의 20분의 1 수준으로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다 같이 못살 수는 있어도 다 같이 잘 살 수는 없다. 수만 년동안의 원시공동체는 다 같이 못 사는 사회였다. 1917년 소련에서 시작돼 지금 북한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주의 체제도 내가 보기엔다 같이 못 사는 사회이다.  그래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읶는 지도자 등소평이 첫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 ‘일부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격려한다(鼓勵一部分人先富起來)’이다.

지금 중국의 빈부 격차는 선진국을 뺨칠 정도로 심하다. 그러나 중국 국민이 왜 참고 있는가?  옛날 다 같이 잘 살려고 부자의 재산을 빼앗는 정책을 썼는데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더니 30년이 지나니 대만의 10분의 1로 빈궁해졌다.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어야 가난한 사람의 수준도 덩달아 올라간다는 이치를  중국의 지도자들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적어도 중국의 40대 이상은 이 교훈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인간사회가 빈자와 부자로 갈라지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다 같이 잘 살면 얼마나 좋으며 그러한 사회는 얼마나 이상적인 사회인가?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다 같이 평균적으로 살자는 것은 다 같이 못 사는 결과를 낳았다. 빈부의 격차가 있어야, 심지어 그 격차가 심해야 빈자도 분발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빈부격차를 혐오하면서도 감내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정도이다.

지금 한국은 경제민주화, 복지, 무상급식 등을 부르짖으며 평균주의 추구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써먹다가 버린 정책들을 하나하나 건져내 다시 쓴다는 느낌이 든다. 100 달러 소득자가 460 달러 환상에 빠졌다가 결국 1인당 소득이 46 달러 이하로 줄어든다는 생각을 해봤나? 국가, 공기업 및 개인이 진 빚을 당장 갚아고 나면 한국 국민의 생활수준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공짜 복지 좋아하다 쪽박 찰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한국 사람들은 왜 애써 무시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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