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0] 의병활동과 연해주 한인들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0] 의병활동과 연해주 한인들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3.1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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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지지 속에서 한반도를 종속시키기 위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1905년 11월 17일에는 조선정부로 하여금 을사조약에 서명케 했으며, 조선의 주권은 풍전등화의 상태에 서있게 됐다.

많은 정치적인 항일인사들과 무장해제를 당한 조선의 병사들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이주를 떠났으며, 상실해가는 조선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일투쟁이 연해주지역에서도 무르익게 됐다.

때마침 1905-1907년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사건들은 연해주 한인들에게 식민적인 외세에 대항하는 능동적인 정치적 행동의 성향과 압제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에 한인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연해주에 의병운동의 전투기지가 마련됐고, 독립군 부대가 형성되고 무장됐다.

1906년에 최초의 의병부대가 포시에트지구에서 조직됐다. 이 부대를 지휘한 사람은 러일전쟁에도 참전경험이 있으며,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던 최재형이었다. 최재형 또한 국경지역 일본군을 급습하거나 이범윤부대 등의 다른 의병부대들, 안중근 등의 항일인사들의 무장투쟁활동을 지원했다.

이밖에도 안중근, 전재익, 이범윤, 이삼술, 홍범도, 이춘호, 유인석, 엄인섭 등의 의병부대들이 조직되어 도처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의병들의 의병활동에 실제적인 기지가 된 것은 연해주지역에 산재해 있던 한인정착촌들이었다.

1907년 수찬에서 한인들은 군자금으로 7천 루블과 260정의 소총, 포시에트지구에서는 1만 루블의 군자금과 생필품들을 한인의병들에게 지원하기도 했다. 의병부대들은 국경지역에 있는 포드고르노예, 나고르노예, 크라스노예 셀로 등의 한인정착촌에서 한인들의 군자금 등을 지원받았으며, 조선북부에서 조직된 의병부대들과 연합으로 경흥, 회령, 경성, 명천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수비대를 기습했다.

1908년 6월 23일 새벽에는 크라스노예 셀로 세관초소 지역 내에 있는 포드고르나야 마을 주변에서 노란색 바지에 곤색 셔츠와 머리띠를 두른 수찬지역에서 온 96명의 의병들이 탄약과 무기들을 3대의 수레에 싣고 조선으로 잠입하여 6월 24일에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여 14명을 사살했다.

특히 조선북부의 회령 전투에서는 일본군 64명을 사살하고, 30여명을 부상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908년 한해에만 일본군들과 1,451회의 무장충돌이 있었고, 한인 의병수가 69,804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조선북부와 서부에 있는 일부 도시들은 의병들에 의해 점령됐고, 문산 또한 1908년 5월에 점령되어 한때 의병들의 수중에 있기도 했다.


의병장들 중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이범윤을 꼽을 수 있다. 이범윤은 본래 정3품 간도 국경행정관(관리사) 겸 조선북부지역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러일전쟁 동안에 아니시모프 장군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특별한 한인무장대를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항일운동의 지도자가 되고자 1907년 여름에 노보키예프스크에 정착한 인물이다.

이범윤은 노보키예프스크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말에 이범윤 휘하의 의병들이 조선의 북쪽에서 일본군대에 타격을 주었고, 이러한 소식은 연해주 남부의 노보키예프스크에 있는 한인 정치망명자 집단을 고무시켰다.

1908년 초에는 40~50명의 자원자들로 구성된 무장부대를 이끌고 훈춘을 통해서 두만강 상류를 따라 들어가 조선북부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항한 기습전을 벌이기도 했다. 1908년 7월에는 200여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조선북부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부대를 공격했다.

이범윤은 직접적인 무장활동 이외에도 한인들 사이에서 비밀선동활동과 의병조직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모금활동의 책임을 맡은 수찬지구 블라디미로프카 마을의 태순세와 김상호(김선달), 원상집에 의해, 수찬 지구에서 총과 실탄을 제외하고 현금으로 약 7000루블이 모금됐다.

1908년 4월 이범윤은 이중에서 1800루블과 수찬과 포시에트지구에서 마련된 약 260정의 총을 대원들을 통해서 조선지역 의병부대에 보냈다. 또 1910년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반일적인 삐라를 유포하여 한인들을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 당시 연해주에서 한인의병부대들은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체류하던 이범윤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번갈아 체류하던 홍범도, 그리고 유인석이었다. 이들은 조선과 조선이외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으며, 1910년 7월 8일 야유쉬카(안반비) 마을에서 150명의 한인의병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를 개최하고, 군사조직인 ‘창의소’를 조직했다.

그 결과 13도의군인 창의소 사령관에는 유인석, 의장에 이범윤, 부대장에 이나식, 군사교관에 이상설이 선출됐다. 한인의병들의 게릴라식 기습에 골머리를 않았으며, 이에 일본은 외교채널을 통해 항일투쟁을 제압하고자 했다.

일본당국은 이범윤에게 1만 루블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이범윤은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상얀치헤지역 등지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일본정부의 압력에 제정러시아 중앙정부 또한 프리아무르(극동) 군사령관지사에게 러시아 내에서 항일활동이 전개되지 않도록 실제적인 조치를 즉시 취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범윤을 체포하기 위한 체포 작전이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그때마다 이범윤은 용케도 몸을 피했다. 하지만 실시된 이범윤 체포수색작전에서 29명의 이범윤 측근 의병들을 체포됐고, 일본측의 신병인도 요구에 러시아당국은 일본 측에 넘기면 심한 고문 후에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우려하여 인도하지 않았다.

이후 이범윤 또한 체포됐고, 이범윤은 심문에서 빨치산 활동과 홍범도와 박기만이 창의소 지도자라고 시인했다. 운테르베르게르 군사령관지사는 이범윤 등 7명의 항일투사들을 이르쿠츠크로 유배 추방시켰으며, 1911년 5월에 재입국이 허락됐다. 이후에도 일본측의 한인의병활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탄압은 계속됐고, 페테르부르그주재 일본대사관은 이동휘, 이범윤, 홍범도, 이강, 정재관, 이위종, 김성립, 김성백, 최재형, 김진, 엄인섭, 이상설 등의 명단과 항일내력이 적힌 문건을 보냈으며, 나아가 신병인도 및 강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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