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60] 조선통신사
[아! 대한민국-60] 조선통신사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4.03.1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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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사관(使館)에 연일 심상한 시인들의 방문이 잇달아, 시를 부르고 화답하기와 필담으로 쉴 새가 없어 고통을 겪었다.… 시문집의 서문이니 화제니 화상의 찬(讚)이니 영물시(詠物詩)같은 것들을 모두 내가 손수 쓰고 낙관 찍은 것을 받아가기를 골몰히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도무지 쉴 겨를이 없었다.”

1719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이 그의 여행기 「해유록(海游錄」에 쓴 글이다. 그에게 시·서·화의 인정을 받으려고 몰려드는 일본 지식문화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늘날 한류 스타가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거나 도쿄의 중심부에서 사인회를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조선의 국왕이 일본 에도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하는 공식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는 이처럼 일본 지식인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대륙의 문명과 조선의 문화를 섬나라 일본에 전하는 문명교류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명 안팎에 이르렀고, 그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에 12차례나 일본에 건너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지 불과 9년만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재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서는 일본에 끌려 간 포로들을 쇄환(刷還)시켜야 할 절박함이 있었고, 일본 또한 조선침략에 따른 국교단절을 시급히 복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전쟁을 치른 두 나라의 정치감각이 놀랍다.

통신사 일행이 조선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에도(지금의 도쿄)에 도착하는 두달 동안 일본 각 지역의 지식인들은 다투어 조선통신사 일행을 만나 함께 시를 읊기를 원했고, 글과 그림을 청하거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그것은 장엄한 한·일 문명교류의 현장이었다. 일본에는 아직도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그림, 두루마리, 병풍, 족자, 인형 등의 문화유산이 다수 남아있다. 과연 조선통신사는 한류(韓流)의 원조(元祖)였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할이 이렇게 크다 보니 일본 쪽에서도 조선통신사를 맞기 위해 조선어를 익히거나 문장력이 좋은 이를 통신사를 접대하는 관리로 뽑는 등 정성을 다했다. 조선통신사의 접대에 막대한 막부예산이 들어가는 바람에, 농민봉기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외교의전을 놓고 내부 갈등을 빚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에는 그 명칭을 수신사(修信使)로 개칭했는데 최초의 수신사는 김기수(金綺秀)였고, 1880년에는 김홍집(金弘集)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보고 돌아와 개화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문화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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