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1] 연해주 한인들의 종교와 교육활동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1] 연해주 한인들의 종교와 교육활동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3.1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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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지역 한인들의 교육활동은 18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초기에 한인들의 학교교육은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부는 신성종무원이라는 러시아 세속당국의 한 행정부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교회의 한인들을 상대로 한 선교 및 교육활동은 순수한 종교적 활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정교회 지도부는 지속적인 교육활동을 통해서 한인들을 러시아화 시키고, 러시아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교사는 교회사제나 카자크인 군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며, 자녀교육에 열정을 가진 한인 부모들은 자식들만큼은 기꺼이 교회학교에 보내고자 했다. 교육에 대한 한인 부모들의 열정은 학교건축으로도 이어졌다.

한인정착촌의 많은 학교들이 한인 부모들의 기부금에 의해서 세워졌다. 물론 1880년대에 들어서 일부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초빙된 조선인 교사가 조선어교재로 가지고 가르치는 학교들도 운영되기도 했다. 이 무렵 세속당국의 지원 부족으로 한인들의 학교교육은 여전히 열악했다.

1899년 1월 1일 독자적인 블라디보스토크 주교구와 블라디보스토크 주교구 정교회 선교부 위원회의 조직(10월 10일)으로 이민족 선교는 보다 체계화됐고, 더 많은 수의 선교사와 교육체계가 마련됐다.

그 결과 12월에는 지신허와 아디미 선교지부에 카잔신학아카데미를 졸업한 2명(이오사프, 블라시)의 전담선교사들이 내정되어 한인들에 대한 선교 및 학교교육이 강화됐다. 1907년 아디미에는 2,500루블의 적은 선교부 지원금에 한인들의 기부금을 보태어 16,000루블을 들여 웅장한 교회학교가 건립됐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연해주와 아무르주의 블라고슬로벤 노예마을 이외에도 자바이칼주의 치타와 이르쿠츠크에서도 정교회의 선교와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특히 1909년에는 블라고슬로벤 노예마을에 러시아정부의 지원으로 노년층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90루블을 들여 여학교가 건립되어 교육부에 의해서 운영됐다.

또 치타에서는 정교회로 개종한 이강과 정재관 등에 의해 <대한인정교보>가 발간되어 정교신앙이 크게 고취됐다. 한편 1911년 12월 18일에는 예프렘대사제의 도움으로 차타 쿠즈네츠느이 랴드이 거리에 한인정교학교가 세워져 정교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 졌다.

이때 교직원으로 교장 이문오, 교감 이재한, 교사 김택, 최고려, 박집초(영어) 등이 근무를 했다. 이렇듯 한인들은 극동지역 전역에서 주로 정교회 신앙 속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당국의 적은 지원 속에서 혁명 전에 글을 아는 한인은 20%정도에 불과했다.

1910년대에 들어서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는 더욱 높아졌다. 1917년경에 한인들에 의해서 건립된 사립학교가 182개(학생 5천750명, 교사 257명), 공립학교는 43개(학생 2천539명, 교사 88명)였으며, 총 8천289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소련방이 구성된 이후에 소련의 교육체계는 크게 변화를 겪었다.

1925-26년말에는 사립학교는 사라지고, 154개의 공립학교에 학생수가 10,646명(교사-262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신한촌의 한민학교와 이포(리포허)지역의 명동학교는 체계적인 민족교육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초등학교이기도 하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시기에 중학교들도 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24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9년제 중학교(8호모범한인중학교)가 열려 607명의 학생(교사 19명)들이 공부를 했다. 농촌에도 초등학교에 토대를 둔 2개의 농민청년학교가 문을 열었고, 1931~32년에는 21개(3천73명)로 증가했다.

특히 8호모범중학교는 1930년대에 많은 한인지식인들이 교사로 활동하며 한인학생들을 교육했던 곳으로,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던 계봉우 또한 이곳에서 근무를 했다. 함남 영흥출신인 계봉우(1880~1959)는 신민회 등 한말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1910년 북간도로 망명한 후 간민교육회와 광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와 신한촌에 있던 권업회의 권업신문사와 대한광복군정부 책임비서로도 활동을 했다. 1914년 6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잡지에 안중근을 변호하는 글을 게재했으며, 1914년 3월 이래로는 안중근 전기를 기술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이봉우와 함께 기독교 모임의 강당을 마련하고, 하마탕에 초등학교를 건립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1916년 북간도 하마탕에서 일본영사관 경찰들에게 체포된 계봉우는 조선으로 이송되어 유배생활 후에 고향에서 연금생활을 당했다. 3․1운동 이후 다시 북간도로 망명한 계봉우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이동휘, 김립 등 한인사회당,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계봉우는 주로 신한촌에서 저술 및 교육활동에 전념했으며, 나중에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말년을 보냈다.

한편 1923년에는 한인교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우수리스크 러시아사범전문학교 내에 조선어과가 개설됐다. 이곳에서 21명의 한인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를 토대로 이듬해에 자립적인 조선사범전문학교가 설립됐다.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서 정식 설립된 이후 강제이주 전까지 244명의 교사들을 배출해 내었다.

하지만 하나의 사범학교로는 증가하는 학교의 수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고, 1930년에 포시에트에 또 하나의 조선사범학교가 건립됐다. 1931년에 극동지역 한인의 역사에서 최초로 조선사범대학과 교원대학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문을 열었다.

1932년 가을부터 4개 학부(역사, 문학, 수리, 생물)에서 730명의 학생들이 수학을 했으며, 학교 내에는 단기과정의 노동학원이 부설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인들은 민족교육을 통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고유한 문화와 역사, 전통을 유지시켜나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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