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3)
[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3)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3.22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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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1): 경주유산 입문(6)

목탑부터 출발

신라에 탑이 전래된 것은 불교가 공인되던 6세기 경의 일이다. 불상이 중국과 고구려, 백제를 거쳐 전래된 것처럼 탑 역시 같은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중국에 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2세기 경이었는데 중국의 탑은 봉분 형태로 만들어진 인도의 산치탑과는 달리 여러 층의 누각 형태로 조성되었다.

중국인들은 탑을 부처와 보살이 사는 집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그들은 사람이 사는 집처럼 목재나 벽돌을 사용하여 탑을 만들었다. 누각식 중국탑은 4세기 경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수용하자 이들을 모방하여 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목탑이 주를 이룬다.

▲ 법주사 목탑 팔상전(국보 제55호)
이들의 예는 황룡사9층탑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현재 사라진 상태로 실물로는 보은 법주사에 있는 팔상전이 있다. 18세기에 건설된 쌍봉사 대웅전은 목탑의 고유한 기울기를 그대로 간직하여 3층목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녔는데 불에 탔는데 그 자리에 새로 복원된 건물이 있지만 원래의 고아한 맛을 잃어버렸음은 사실이다.

이들 탑을 보면 꼭 건물처럼 생겼으므로 법당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팔상전은 엄연히 목탑이다. 탑과 법당이 다른 것은 탑에는 붓다의 사리를 모셨고 법당에는 불상을 모신다는 점이다.

목탑은 목재로 만든 일반 궁궐 건물 등과는 매우 다르다. 굵은 원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와로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물에 사용되는 재료는 다른 건물과 차이가 나지 않지만 여러 층으로 건물을 높이 올리기 때문이다.

목재로 고층 건물을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므로 목조 건축을 짓기 위한 나무의 공급이 원활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무는 많더라도 연중 기온의 변화가 심하여 커다란 목탑을 세울 만큼 질 좋은 목재의 생산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신앙심을 따라갈 목탑을 계속 건립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건축 구조상의 문제점들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정된 목재 공급으로는 필요한 목탑을 건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목탑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강구해야 했다.

▲ 분황사 모전석탑, 안동신세동7층전탑(국보제16호), 안동신세동7층전탑(국보제16호)
목탑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창안된 것이 전탑이다. 돌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모전석탑이나 돌을 나무처럼 다듬어 세운 목탑 형식의 석탑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분황사 모전석탑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네 면에 화강암 석재를 끼워 넣어 순수 벽돌로만 탑을 조성했던 중국 전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통일 무렵 모전석탑은 목탑계 석탑의 양식을 절충하는 형태가 나타난다. 구운 벽돌로 만드는 전탑도 문제점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진흙이 많아야 했는데 이 역시 중국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한반도는 전탑을 만들 수 있는 진흙이 풍부하지 않은 반면에 곳곳에 화강암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있는 재료 즉 돌을 이용하자는 생각을 낸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석탑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갖게 만든 요인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주에 사탑이 많이 세워지면서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인력과 경제력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나타난다. 모전석탑은 바위를 일일이 작은 벽돌로 쪼개어 다듬어야 했지만 목탑계 석탑은 돌의 크기를 좀 더 크게 하여 부재의 수효를 줄이고 모양을 단순하게 하여 쌓는 아이디어를 도출했는데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이 그것이다. 이런 탑들은 몸돌에서 한 단계씩 점점 넓혀가며 쌓다가 가장 넓은 면에서 다시 한 단 계씩 좁혀가며 쌓는 식으로 옆에서 보면 한 층의 모양이 마름모꼴을 이룬다.

▲ 미륵사(국보 제11호), 정림사5층석탑(국보 제5호)
석탑의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곳은 백제이다. 백제는 돌 자체의 성질을 살려 목탑의 부재를 돌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익산의 미륵사탑(국보 제11호)이 그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서탑의 경우 1층 기둥 모양의 틀에 목재를 다듬듯이 배흘림을 주었고 기둥 위에도 목조 건축의 가구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두공과 방(榜) 등을 두었으며 넓은 판석을 다듬은 지붕돌의 처마 부분도 기와집의 지붕처럼 처마선이 약간 들리도록 했다.

문제는 석재로 이렇게 만들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돌의 성질에 맞게 세부를 단순하게 해서 다듬었는데 이렇게 만든 탑이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오층석(국보 제9호)탑이다. 익산의 미륵사탑보다는 훨씬 간결해졌는데 그래도 미륵사탑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목조 건축의 느낌을 보여준다.

뒤를 이어 몇 개의 큰 돌만 깎아 세우는 방식을 채용한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덕동호 댐 건설로 수몰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 등이 등장한다. 이들 탑은 백제와 신라에서 각기 계통을 달리하며 발전했던 석탑 양식이 신라통일과 함께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양식을 형성한 것이다.

곧 신라 석탑은 백제와 고구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으로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후 석재의 수를 극히 간소화하면서 구조도 함께 변화되어 갔는데 대표적인 탑이 나원리 오측석탑과 구황리 삼층석탑이다. 이들 탑은 감은사지·고선사지 석탑의 양식에서 기단부와 탑신부의 구조가 상당히 변화한 탑으로 신라 석탑 양식이 확립된 8세기 초반을 대표한다.

강우방 박사는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용문·운강석굴의 거대한 암석에 수백 수천의 부처들이 조각되어 있지만 석가모니의 실체인 불탑을 바위 즉 돌로 만든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석재라고 볼 수 있는 화강암 같은 견고한 돌로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탑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다른 기술도 요청된다. 목탑은 나무와 기와로 이루어졌으므로 건축적인 기술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단한 돌로 탑을 쌓기 위해서는 건축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다듬는 조각 기술도 합해져야 한다. 단단한 석재를 다루어야 하므로 상당한 석조 기술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기술이다.

신라 석탑은 8세기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에 이르러 독창적인 구조와 형태가 정립된다. 석탑들은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분포하였는데 9세기에 교종 불교가 쇠퇴하고 지방 곳곳에 석탑이 조성되면서 석탑의 구조와 형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석탑 구조와 형식이 정형화될 성질이 아니므로 탑신부·기단부를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정해사지 십삼층석탑은 탑신부의 변화가 두드러진 석탑으로 십상층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높이가 높지 않은 우리나라 유일의 석탑이다.

석굴암 삼층석탑은 탑신부가 사각형이지만 기단부는 팔각원당형인 탑이며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은 서탑이 석가탑과 같은 모습인 반면 동탑은 모전석탑 양식을 따랐다. 구조 변경없이 외부만 여러 조각을 새기는 형태도 나타났는데 원원사지동서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이 그런 예이다.

이들 탑은 정형적인 양식으로 조성된 탑이지만 기단과 1층 옥신에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을 각각 조각했다. 위의 설명이 약간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므로 다소 풀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탑은 크게 볼 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뉜다. 기단부와 탑신부를 구별하는 방법은 집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지붕)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3층탑, 5층탑으로 부르는 것은 이 탑신의 숫자를 갖고 부르는 이름이다. 사리는 바로 탑신 안에 모신다.

탑이 집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탑신부로 지붕이 있고 옥개받침이라는 처마도 있다. 처마는 집의 그것처럼 중층으로 되어 있는데 한옥처럼 그 끝이 약간 올려져 있다. 또한 탑신의 네 귀퉁이에 기둥의 모습((隅柱, 모서리 기둥)을 새겨 놓았으므로 기둥과 지붕이 있는 완벽한 모습의 집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국의 완벽한 탑 즉 집의 결정판은 불국사의 석가탑이다.’

참고적으로 한국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이들 백제 석탑은 석재를 나무처럼 잘라 쌓은 목탑 형식의 석탑인데 이것이 신라에 전래되었고 삼국통일 무렵 석재의 수, 구조 등이 줄어들면서 점차 조각이 다양하게 새겨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석탑이라 하여 모두 화강암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라 중기가 되는 8세기가 되면 석탑 표면에 여러 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엄하기 시작하면서 9세기 이후에는 크게 유행한다. 장엄을 가하는 위치는 상하기단이 중심이 되고 초층탑신에 조각한 예도 있다. 조각하는 상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불, ② 보살 등의 예배대상, ③ 사천왕, ④ 팔부중, ⑤ 인왕, ⑥ 십이지 ⑦ 사자와 같은 수호신, ⑧ 비천, ⑨ 주악상(奏樂像) 같은 공양상에서부터 연꽃 같은 단순한 장식무늬까지 다양하다.

불⋅보살 같은 예배대상은 대체로 탑신에 조각되고 수호신은 기단부에 조각되는데 이러한 구별은 탑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었다는 탑 건립 본래의 정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탑에 여러 가지 조각이 가해지면 탑 자체의 존엄성보다는 표면조각에 시선이 더 쏠려서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식물로서의 성격이 돋보이게 된다. 원원사지3층석탑(보물 제1429호), 남산리3층석탑(보물 124호)을 비롯한 많은 석탑들이 이러한 예이다.

▲ 정혜사지13층석탑(국보 40호), 고선사지3층석탑(국보 제38호)
석탑에는 전형양식에서 벗어난 양식의 탑이 있다. 이러한 탑들을 이형양식이라고 부른다. 그 형식은 매우 다양하여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불교적 또는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경주에서 가장 뛰어난 이형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옥산서위 뒤에 있는 정혜사지의 13층석탑, 석굴암 뒤에 있는 3층 기단이 원형으로 된 3층탑이 있고 바위를 기단삼아 세운 남산용장사의 삼층석탑도 이형석탑이다.

탑에는 부처의 사리와 함께 각종 유물을 넣어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있으므로 이러한 유물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이 유물들은 후세의 수리 때 추가한 것도 있지만 창건당시부터 내려오는 유물이 대부분으로 그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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