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3] 스탈린의 강제이주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3] 스탈린의 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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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3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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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은 극동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들에서처럼 스파이활동과 배신행위에 대한 의심과 혐의의 눈초리가 확산된 시기이다. 극동지역의 한인들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 시에는 일본편에 서서 싸울 소련의 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한인들은 계급의 적으로 한인들의 향후 운명에 서서히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한인들의 강제이주가 시행되기 직전에 폴란드인, 독일인, 이란계인, 쿠르드족에 대한 강제이주가 이었다. 이는 어쩌면 1937년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소련방 인민위원회의 및 전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중앙위원회는 극동변강지역에서 한인들의 스파이 행위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전대미문의 비인간적인 강제이주를 결정했다. 결정문에는, 전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극동변강위원회, 변강집행위원회와 내무인민위원부 극동변강관리국이 극동변강 국경지역의 한인전체를 남카자흐스탄주, 아랄해와 발하쉬호, 우즈벡 공화국으로 이주시키고, 1938년 1월 1일전까지 이 계획을 완료시키라는 등의 12가지 결정사항이 담겨 있었다.

나아가 1937년 8월 24일 내무인민위원 예조프는 극동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류쉬코프에게 반소비에트 활동과 국경지역에서 간첩행위 혐의가 있는 한인들과 반혁명분자들을 긴급체포하여 사법기관에 넘기라는 전문을 보냈다. 강제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1937년 초가을 오후. 정바실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직장에서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서며 아내 마리야에게 물었다. “이주에 대해 못 들었소?” 아내는 “무슨 말공부겠지요. 그러다가 말겠지요”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인구조사는 왜 했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고. 사냥총을 보더니 구역위원회 위원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정바실리 또한 “직장 전문기술자들도 어디로 갔는지... 밤에 데려가더니 통 보이지가 않아. 아마도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라고 중얼거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시기였다. 스탈린의 시퍼런 서슬 앞에 서로 의심하고 친한 사람들도 믿지 못하던 시기였다. 한참 말이 없던 정바실리는 “에이, 될 대로 되라지. 우리야 소인들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애써 불감을 감췄다. 소문은 현실로 닥쳐왔다. 간단한 짐만을 소지하고 내일 모두 기차역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마지막 밤을 정든 고향에서 보냈다.

“고향땅 원동, 정든 도시 아르촘, 정답던 아담한 흰집...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타향으로 가야하는가! 9식구를 거느리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바실리는 정원에 나가 고향 흙 한줌을 쥐어 손수건에 쌌다. 답답함을 하소연할 곳도 신고할 곳도 없었다. “선조들의 묘지를 버리고 영영 떠난다니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는가?” 부부는 멍하니 누워 서로 말없이 닥쳐올 운명을 불안스레 예견해보며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 레츠카역에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우리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9월의 가을하늘은 잔인하도록 푸르렀다. 보채는 아이를 들쳐 업고, 보따리를 맨 채, 바쁜 걸음으로 한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시꺼먼 열차가 마치 먹이를 기다리듯 활짝 문을 열어젖힌 채 기다리고 있다.

열차는 마소나 기타 대형화물 등을 운송하는 화물열차였고, 50-60개의 화물칸으로 이루어졌다. 옆에는 눈을 부릅뜬 러시아 경찰들과 내무인민위원부 호송원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농사짓던 들도 살던 집도, 여물어 가던 농작물도 모두 그대로 버려둔 채, 오로지 몸만 열차에 실었다. 정바실리 부부도 마지막으로 고향의 하늘을 바라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고향 하늘을... 아무도 자신들이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아무도 저 멀리 우쉬토베의 들판에서 황무지를 개간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화물칸 객차에는 창문하나 없었으며, 한쪽에 나있는 문만이 전부였다.

안은 비좁고 덥고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움츠려 있었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들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기차는 역에 정착을 했고, 내리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열차는 꼬박 1달을 달렸다. 한인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을 중앙아시아의 황량이 들판이 나올 때까지...

1937년 10월 25일 극동으로부터의 한인 강제이주는 거의 종료가 됐다. 강제이주 한인들은 공산주의자들, 콤소몰 조직원들, 한인교장 및 소비에트 당원학교 교사들, 일선교사들, 보안기관 요원, 한인빨치산 출신자들, 고등교육기관 학생 등 다양했다.

1937년 10월29일 소련 내무인민위원 예조프는 “1937년 10월 25일 극동지역거주 한인이주가 완결됐으며, 총 124개 객차에 17만1천781명(3만6천442가구)이 이주됐으며, 금년 11월1일에 이주되어 올 특별이주자들이 약 700명가량 남아있다.

한인이주자들은 우즈베키스탄으로 7만6천525명(1만6천272가구), 카자흐스탄으로 9만5천256명(2만170가구)가 이주됐다’고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 몰로토프에게 강제이주 총결산보고서를 보냈다. 한인들의 강제이주지역은 중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인들은 무르만스크, 아르한겔스크, 모스크바, 우흐타, 툴라지역 등, 유럽러시아에까지 이주됐고, 이들은 다시 1940년대에 재이주의 고통을 당했다. 스탈린의 죽음과 더불어 사실상의 강제이주는 종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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