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0)
[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0)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5.10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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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지구(금관)

대릉원지구의 간판스타라면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속칭 대릉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대릉원에는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야간에도 개장(입장시간은 09.00〜22.00까지)하여 어느 곳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오지만(안압지, 첨성대 포함) 이곳은 경주에서 입장료를 받는 몇몇 되지 않는 유적지이다.

경주 일원에서 입장료를 받는 곳은 대릉원, 안압지, 첨성대. 오릉, 포석정, 김유신장군묘, 무열왕릉, 분황사, 불국사, 석굴암, 기림사 등이다. 한편 경주 시민들은 ‘사적지공개관람료징수업무위탁관리조례 제10조’에 의거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미추왕릉(사적 제175호)은 여러 모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다르다. 우선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되었다는 점이고 또 무덤 둘레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묘역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세워져 있으며, 무덤 앞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숭혜전도 건립되어 있다. 미추왕이 그토록 사후에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그가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씨 최초의 신라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에 있는 이서국이 금성(경주)을 공격해왔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무수한 병사들이 나타나 적들을 물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죽엽군(竹葉軍)들도 모두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수만 개의 댓잎이 쌓여 있었다. 백성들은 돌아가신 미추왕이 군사를 보내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하여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미추왕릉에 가서는 무덤의 앞면만 보지 말고 무덤 뒤편으로 걸어가 보기 바란다. 실제로 미추왕릉은 무덤 뒤편에 울창한 대나무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대숲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왕릉 쪽으로 다가가면 눈앞에 죽엽군들이 적을 향해 힘차게 뛰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죽은 김유신이 미추왕에게 찾아가 자손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며 신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미추왕이 달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추왕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인에게 영원한 호국영령으로 상징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신라인들이 그 덕을 생각해서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고 서열을 혁거세의 능인 오릉보다도 위에 두어 대묘(大墓)로 불렀다고 한다.

대릉원에서 놀라운 것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도 북방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이다.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순금제 금관을 비롯해 실용적인 은관(銀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그라스 등 무려 7만여 점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비단벌레(玉蟲)를 잡아, 그 날개 수천 개를 장식하여 무지갯빛처럼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비단벌레 장식 마구(馬具)’도 발견되어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출토품은 고구려와 백제 고분의 출토품과 비교하면 품목과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동 시대의 중국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해보아도 차이가 크거나 전혀 달라 두 문화의 공통점을 거의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의 수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견지했을까하는 질문이 있는데 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신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영위할만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과 전혀 다른 풍습과 문화를 가진 북방기마민족이 신라로 동천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북아시아·카자흐스탄의 이리 강 유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카족의 대규모 고분의 크기는 지름이 30〜100미터로 거의 신라 고분 규모에 가깝다. 특히 지상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놓고 주위에 돌을 채우고 다시 목곽을 돌로 빈틈없이 덮고 그 위에 봉토를 올리는 방식으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유사한데 건립연대가 기원전 7〜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카족을 스키타이 부류로 보기도 하므로 적석목곽분을 스키타이-알타이의 쿠르간 또는 쿠르간으로 줄여서 부른다. 요시미츠 츠네오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원류로 러시아를 거점으로 삼았던 흉노(훈족)로 추정했는데 이 부분은 필자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므로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경주 황남동에 있는 고분 중에서 대표적인 적석목곽분이 황남대총(제98호분)이다. 경주 대릉원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은 적석목곽분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형태상 쌍분, 즉 부부묘로 표형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분(남자)을 먼저 축조하고 나서 북분(여자)을 잇대어 만든 것이다.

황남대총 발굴은 1973년 7월에서 1975년 10월까지 2년 4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국내 고분 발굴사상 단일무덤으로서는 최장 조사기간이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 총 3만 3천여 명이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규모답게 출토유물은 순금제 금관, 비단벌레 장식의 안장틀과 발걸이, 말띠드리개, 유리병 등 무려 7만여 점이나 출토됐다는 점이다.

신라 최대의 이 고분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왕과 왕비가 매장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여자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남자무덤인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왕관 형식상 유례가 없는 은관 1점, 은관과 같은 형식의 금동관 1점 외에 동제 금도금의 금동제 수목관 5점이 출토되었다.

여자의 금관이 더 화려한 이유로 권삼윤은 신라 금관의 주인공이 정치 권력자가 아니라 샤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명한 스키타이의 고분에서 출토된 ‘수하의 기사’에는 7개의 가지를 가진 우주목에 말이 매여 있다. 기마민족이 사는 땅은 나무가 귀한 초원이 대부분이므로 나무가 있는 곳은 성스러운 땅이다.

알타이족은 샤먼이 우주목을 타고 오르면서 환자들을 치료한다고 믿었다. 샤먼은 하늘과 교응하는 영혼의 소유자이므로 병마 때문에 고생하는 자, 불행에 빠져 고통받는 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인식되었다. 당시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샤먼의 중요도는 누구보다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무덤에서 더 화려하고 우수한 부장품이 나왔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설명을 대입하면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의 경우도 남자는 7줄인데 비해 여자는 13줄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된 금관들이다. 금관은 금으로 만든 관모를 뜻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모를 통칭하기도 한다. 관모는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지만 신라 고분의 출토품이 주류를 이룬다.

신라와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7점(가야 1점)이다. 이 중에서 교동 금관을 제외한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금령총‧천마총 금관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학자들은 경주 일원에만 150여 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발굴된 것은 약 30여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발굴 여하에 따라 훨씬 많은 금관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금관을 출토한 무덤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경으로 소위 4명의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의 숫자보다 많다. 왕비나 왕의 가족도 금관을 썼기 때문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 일대에서 금동관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들도 5세기 후반부터는 금관처럼 ‘출’자 모양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경주의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의 소국을 복속시킨 뒤 그 수장에게 일정한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금동관을 비롯 각종 장신구를 하사함으로써 지배복속관계를 유지한 흔적으로 추정한다.

<어린아이 크기의 금관>
금관은 고고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의 직경이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 18.4센티미터, 황남대총 금관 17센티미터, 금령총 금관 16.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센티미터, 복천동 금관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센티미터로 둘레는 53.4센티미터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금관의 크기가 작은 이유로 금관을 어린아이일 때 사용하고 장성해서는 다른 관을 사용했다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신라의 금관처럼 정교하고 호화로운 금관을 어린아이용 소위 장난감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다른 이유로는 금관을 사용하던 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경우를 추측할 수 있는데 5〜6세기의 신라왕 가운데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왕은 없다.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남성의 무덤인 남분이 아니라 여성의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으므로 왕만 금관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금관이 너무 작은데다 실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도 사실이다.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버팀력이 약하고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어른이 사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므로 금관은 생존 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 즉 죽은 자를 위한 일종의 데스마스크 용도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이집트 무덤에서 나온 황금마스크와 비슷한 용도라는 것이다. 특히 피장자의 발치에 묻혀 있는 금동신발의 바닥에 스파이크 같은 장식이 있어 실용성이 없으며 또 다른 부장품인 금제 허리띠도 무게가 4kg이나 되는 것으로 볼 때 금관도 장례용 부장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물론 특수한 걸이나 끈을 사용할 경우 머리에 쓰고 활동하거나 무속의 한 형태로 춤을 출 수도 있다는 설명도 있다. 금관을 어떻게 머리에 썼을까하는 연구에서 세움장식을 실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 모자를 쓴다면 머리에 쓸 수 있다는 해석도 제시되었다.

특히 중국 당나라 장회태자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 중에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도가 있는데 이 그림에 의하면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이 쓴 관모는 머리의 정수리 부분에 얹혀 있다. 이러한 관모는 또 테두리 양쪽에 길쭉한 끈을 드리워 턱밑에서 묶고 있다. 신라 왕의 금관 또한 착용법이 이와 비슷할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설 모두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것을 매끄럽게 해석할 수 없으므로 고고학자들이 풀 수 없는 큰 숙제 중에 하나였다.

이 문제는 금관의 착용자가 인공 변형된 두개골인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라면 쉽게 해결된다. 편두란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편두에 관한 기록은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납작하게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다.’

기록 속의 진한(辰韓)은 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弁韓), 즉 김해지역의 가야인이 여기에 포함된다. 편두 풍습은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편두 풍습은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다. 남아메리카의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는 물론 멕시코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서남부의 인디언에서도 발견되며 대양주의 뉴기니, 뉴칼레도니아, 뉴헤브리디스제도 등 고립된 섬에서도 보이며 소아시아,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중앙아프리카, 인도에서도 발견된다. 중앙아프리카의 몸부투는 물론 이집트에서도 보이는데 근래 미라를 근거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된 이집트의 투탕카멘왕의 얼굴도 전형적인 편두다.

편두는 현대인의 눈에는 다소 기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지역의 무당들이 편두라고 알려져 있다. 편두는 워낙 많은 민족들이 차용했으므로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다. 당연히 만드는 방법에 따라 머리 모양도 다르게 변형된다.

첫째 유형은 식물을 꼬아 만든 새끼줄이나 가죽 끈으로 이마, 관자놀이, 침골 부위를 돌려 묶는 것이다. 이 방법은 머리 모양이 전체적으로 길고 좁아지며 뒤통수도 비교적 직선에 가깝다. 둘째는 딱딱한 판자를 머리 앞뒤에 대고 끈으로 묶어두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이마와 뒤통수가 편평해지고 머리가 길어져서 옆에서 보면 이마뼈가 편평한 나무판처럼 보이며 정수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셋째는 중국의 대문구유적지에서 발견된 편두로 바닥에 딱딱한 물건을 깔고 유아기의 아이를 장시간 눕혀두는 것으로 머리 뒤쪽이 편평하게 된다. 이를 첨형 편두라고 하는데 왼쪽 뒤통수가 더 기울게 했다. 지금도 산동성과 강소성 북부에서는 아이머리 밑에 책 같은 딱딱한 물건을 받쳐놓아 뒤통수를 납작하게 한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머리 모양이 사방형으로 되면 아이가 똑똑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헌강왕 11년(885년), 왕은 최치원에게 882년에 입적한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건립을 위해 비문을 짓게 했다. 지증대사는 824년에 출생하여 9세인 832년에 부석사에서 출가했고 신라 경문왕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초청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교화활동에 힘썼다. 지증대사탑비는 현재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귀부와 이수 및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 2010년 1월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315호로 재지정되었는데 이 비문 서두에 신라 왕의 두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姓)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편두인 국왕 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以姓參釋種 偏頭居寐錦至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이는 신라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거매금,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은 통칭으로 신라의 지배자를 의미하므로 최치원이 적은 편두란 존귀한 신라 왕이 편두였음을 뜻한다. 크기가 매우 작은 금관은 한국이 대표하는 유산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금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편두라면, 즉 신라의 왕을 비롯한 지배자들이 편두였다면 금관이 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 언론인 안태용은 편두가 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참고적으로 지증대사비가 있는 봉암사는 4월 초파일 단 하루만 봉암사를 외부인에게 공개한다. 봉암사가 선원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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