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0] 고려극장과 문예부흥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0] 고려극장과 문예부흥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5.2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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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극장의 기원은 강제이주 이전의 극동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동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됨과 더불어 문학과 예술분야에서도 민족문화발전이 진행됐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소비에트 당국의 결정으로 한인신문「선봉」이 창간됐고, 한인민족학교와 사범대학, 극동대학에는 한국학과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조선 민족문학작품이나 푸쉬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등의 문학작품들이 조선어로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울러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곳에서 독자적인 문화예술공연단체들(가무예술단)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단체들은 1920년대 말에 연해주의 거의 모든 한인정착촌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활동했던 한인 예술공연 단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블라디보스톡 담배공장 산하 한인노동자들(전후검, 전 빅토르, 이기영, 이 마리야, 최봉도)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를 들 수 있는데, 연극공연담당이었던 김익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김익수는 교육받은 재능 있는 인물로서 러시아 문학과 극을 애호했으며, <보스톡키노> 스튜디오에서 영화 ‘도둑’ 촬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로 절박한 문제의 주제들이 연극으로 상연됐고, 선동적인 성격을 띠었다.

또 하나는 1924년에 ‘신한촌’ 클럽 내에서 결성된 단체로, 블라디보스톡뿐만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주도적인 단체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이후 카자흐스탄의 공훈배우들이 되는 이함덕, 이길수, 태장춘, 김해운 등이 활동을 했다.

블라디보스톡의 재능 있는 한인 젊은이들과 통합된 단일의 한인극장의 조직을 지원했던 지식인들이 이 단체를 출입했다. 주로 혁명과 내전에 관한 주제의 희곡들이 상연됐고, 이 무렵은 태장춘은 연극이론(희곡작법)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태장춘은 김해운과 함께 희곡 <불꽃>을 썼으며, 그 속에서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단체는 특히 러시아 극장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했으며,「선봉」신문사 편집국원들과 한인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극동대학 산하 당학교 수강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극상연을 하는 대중적인 관람이라는 전통을 세워나갔다.

이외에도 제8호 모범중학교 내의 클럽을 들 수 있다. 이는 ‘신한촌’ 희곡클럽의 지부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저명한 무대감독이자 극작가인 연성룡과 최길춘, 이경희가 배출됐다. 또 하나는 푸칠로프카 마을의 1929년 설립된 청년농민학교 내의 클럽이다. 이곳에서는 이후에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철학박사가 되는 박일과 인민배우로 활동하게 되는 김진, 조선프롤레타리아 작가동맹 회원이었던 조명희가 주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이러한 한인 예술공연단체들의 활발한 활동과 민족문화의 발전은 전문적인 한인극장의 필요성의 인식으로 이어져, 마침내 1930년 블라디보스톡에 한인 30여명을 구성된 ‘청년노동자극장(ТРАМ)’이 조직됐다. 이때 무대감독에 연성룡, 대표로 염상일이 선출됐다. 하지만 ‘청년노동자극장’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1931년 전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연해주 주당위원회의 결정으로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직업동맹<르이브닉> 중앙위원회 산하의 ‘한인선동문화브리가다’로 재조직됐다.

이후 소비에트 당국은 새로 조직될 한인이동극장의 극장장으로 김태이를 임명하고, 블라디보스톡에 한인극장을 조직하고, 1932년 11월 1일까지 배우단의 조직을 마칠 것을 지시했으며, 마침내 1932년 9월 9일 소비에트 당국의 결정에 따라 ‘한인극장’(고려극장)이 탄생됐다.

바로 1932-37년 시기에 배우단이 형성되고 민족연극이론이 생겨났으며, 한인극장의 창작방향의 색깔이 정해졌다. 이 시기에 공연된 우수한 작품들로는 이정님 각색의 <춘향전>, 채영의 <장한몽>, 크. 트레네프 의 <야로바야의 사랑>인데, 한인극장을 민족창작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해준 작품들이다. 한인극장은 극장 지도부의 열정과 조직능력, 젊은이들의 창작적인 열의를 통해서 산적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갔다.

배우들은 야간공연이나 연습이외에도 객연을 조직하고 무대장치와 소품을 만들고, 기계설치공 및 짐꾼의 역할까지 수행해 냈다. 한인극장 단원들은 수많은 장애들을 극복해 내어야 했다.

배우들은 7-8시간씩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으며, 무대장치와 소품 마련에 자신들의 봉급을 털어 넣기가 일쑤였다’고 한인극장 배우들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공연을 위해 배로 이동을 하기 위해서 선착장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갑자기 큰 바람에 파도가 일면서 예인선에 묶여있던 배가 떠내려 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배우 김홍남이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고는 아직은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서있던 동료 배우들은 구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도가 김홍남을 삼켜버린 것이다.

모두 김홍남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김홍남은 예인선 옆에 모습을 드러냈고, 다행히 모두가 이동을 마칠 수 있었다. 대중들로부터의 사랑과 존경받는 훌륭한 한인극장 배우들이 되기까지 배우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1937년 강제이주... 한인들은 고향인 극동을 모든 것을 남겨둔 채 떠나가야 했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던 시절... 그랬기에 한인들은 더욱더 아픔을 달래줄 그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했는지 모른다. 콜호즈 조직과 함께 한인들은 민족문화 부흥을 노력에도 착수했다.

바로 한인극장(고려극장)의 부활이다. 한인극장은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된 후, 당국의 결정으로 ‘크즐오르다 주립음악연극조선극장’(이하 고려극장)으로 재조직된 후에 1942년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1939년 12월 소련 인민위원회의는 ‘카자흐스탄소비에트공화국 이주한인 정착 및 경제적 안정을 위한 대책 결의안’을 결정하고, 소련 재정인민위원부에 ‘카자흐스탄소비에트공화국 1938년도 예산에서 고려극장 유지 지원금으로 25만 루블을 책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고려극장 수리작업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려극장 사람들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 고려극장은 소비에트 희곡을 섭렵하는 주력했으며, 막심 고르키의 <적들>, 태장춘 작의 <행복한 사람들>, 아. 코르네이추크의 <분함대의 죽음> 등의 작품 등이 무대에 올려졌다.

고려극장은 다른 민족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타민족의 음악과 프로그램도 공연했으며, 한편으로는 주로 콜호즈를 순회하며 공연을 수행했다. 이 시기는 김진, 이길수, 이함덕, 이경희, 최봉도, 박춘섭, 이 니콜라이, 김홍남, 손병호 등의 극작가, 배우로서의 수준이 크게 함양된 시기이다.

이후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1월 13일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의 결정으로 관객기반의 확보와 정상적 제작기반 하에서의 작업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탈드이-쿠르간주의 우쉬토베로 다시 이전됐다.

이때 알마타주 재정부가 고려극장의 이전경비로 5만 루블을 할당했다. ‘탈드이-쿠르간 주립극장’(이하 고려극장)으로 재조직된 고려극장은 1959년 재차 크즐오르다주로 이전될 때까지 우쉬토베에서 활동을 했다.

우쉬토베에서 고려극장은 구역문화클럽 건물에 자리를 잡았고, 배우들과 지역 콜호즈 조합원들의 열의와 성의로 갈대와 점토로 만든 보조 건물이 지어졌다. 지붕은 빗물이 샜고, 난방이 되지 않아 배우들은 차가운 무대에 섰으며, 관객들은 털장화와 외투를 입고 관람을 해야 했다.

극장단원들은 콜호즈 내의 작은 클럽건물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정기적인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해 창작활동에 지장이 초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준비된 극장공연은 한인 이주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극장예술지도원인 최길춘은 고려극장 건설을 승인해 줄 것과 자체 발전시설설비, 단원들의 주택확보, 식료품 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청원했으며, 주당국 또한 고려극장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고려극장 배우들의 열정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다. 전쟁기간에는 크. 시모노프의 <러시아사람들>, <낮과 밤>(1944), 크. 핀의 <표트르 크르이모프>(1942), 브. 카타예프의 <푸른 손수건>(1943), 태장춘의 <홍범도>(1942), 이길수의 < 폭풍>, 채영의 <옛친구들> 등, 전시-애국적인 소재의 희곡들이 무대에 올려졌다.

한편 이 무렵에 노래가 곁들여진 고려 경연극이 크게 발전했다. 전동혁, 태장춘, 연성용, 김해운, 이길수 등의 시에 박연진, 이 게르만, 오철암 등이 작곡하고, 이 니콜라이, 이봉운, 이함덕, 이경희 등이 연출한 노래의 경연극이 공연프로그램의 주류를 차지했다. 극동에서 고려극장이 개원된 이래로 1943년도까지 고려극장은 1484가지의 연극을 상연했고, 총 39만 7천명이 관람을 했다.

극장 지도부는 알마타주 주당위원회와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에 김진, 이함덕, 채영 등의 극장 중요 인물들에게 상훈과 공훈배우 칭호를 부여해줄 것을 청원했으며, 이 청원은 1962년 11월 중순에 개최된 고려극장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받아들여져 김진, 이함덕, 조정구, 이연수, 채영 등의 주요 인물들이 카자흐공화국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의 칭호를 하사받게 됐다.

전후에는 고전작품들에 다시 관심을 두었고, 당기관의 결정에 따라서 엔. 고골의 <검찰관>(1952), 브. 쉐익스피어의 <오델로>(1953) 등의 러시아 및 세계고전희곡들을 상연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상연은 고려극장 배우와 관계자들의 공연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극작가 채영은 카자흐스타 한인콜호즈의 성공을 주제로 한 <즐거운 생활>(1949)을 무대에 올렸으며, 태장춘의 <38선 남쪽에서>(1950), 연성용의 <불타는 조선>(1952)과 같이 한반도와 관련된 작품들도 공연되어 많은 한인들의 사랑과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고려극장은 한인관객들과 타민족들과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것을 극장의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따라서 러시아, 카자흐,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우즈벡, 그루지야 희곡 작품들이 고려극장의 무대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고려극장은 콜호즈 극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인 콜호즈 순회공연을 자주 가졌으며, 땀과 정성이 깃든 공연을 통해서 중아아시아라는 새로운 터전 속에서 개척의 시련을 이겨나가고 있는 한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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