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6)
[과학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및 불국사·석굴암(26)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6.2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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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지구(서남산(3))

신전으로서의 포석정
포석정의 과학을 보면 서양과학은 논리적이며 동양과학은 비논리적이라는 구태의연한 고정관념을 깨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남문현 박사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조선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뿌리가 바로 포석정에 깃든 공학기술의 지혜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포석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라기보다는 신탁이 행해지는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원래 중국에서는 포석정이 건물 안에 설치되는 것이 정설인데, 우리의 포석정도 건물 안에 세워져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이다. 이런 장소를 두고 규모도 크지 않은 포석정에서 노천 파티를 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된 날짜는 음력 11월 양력으로는 12월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추울 때이다. 이런 날 노천의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왕비 등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포석정을 방문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경애왕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을 방문한 것은 쓰러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해 제사 혹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여겨진다.

포석정이 단순한 노천 파티장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삼국사기』 문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제기되었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며 놀았다(遊鮑石亭宴娛)’에서 ‘유(遊)’를 ‘놀았다’가 아니라 ‘갔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려 시대에 작성되었음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되었다. 저자들이 신라 멸망의 당위성과 새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부각시킨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의 정종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애왕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즉 팔관회(八關會)를 열기 위해서 포석정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라는 진흥왕 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으로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 때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팔관회를 열었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도 몽고가 침입했을 때 강화에서 팔관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보아 팔관회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치러진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팔관회가 열렸던 시절은 모두 음력 11월이었다.

정종목은 견훤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던 때,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아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이종욱 교수도 포석정을 시조묘와 연관시켜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같은 인물을 모신 사당 즉 신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박씨로 왕위에 오른 경애왕도 조상들을 찾아가 나라를 수호하고 박씨 왕의 지위를 유지시켜 달라고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포석정에서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고 1999년에는 ‘포석(鮑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기와조각이 나온 곳은 포석정 모형전시관을 건립하려는 포석정 남쪽의 4,300제곱미터의 부지로 시굴 조사과정에서 가로 12센티미터, 가로 16센티미터의 기와에 나뭇가지 무늬와 함께 포석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 6점이 출토된 것이다.

기와에 새겨진 포자는 포석정을 뜻하는 포(鮑)자가 아니라 포(砲)자 인데 학자들은 포(鮑)자를 약자화해 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적으로 포석정은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덕궁 후원의 깊숙한 옥류천 개울가에도 있다.

1500평이 되는 창고
포석정과 지마왕릉 사이로 산행도로가 있는데 이곳에서 ‘경주 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拜里潤乙谷磨崖佛坐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과 남산신성을 답사할 수 있다. 이들은 창림사지3층석탑에서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이곳에서는 포석정과 지마왕릉 중간의 산행도로를 취한다.

산행도로는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오히려 산행하는데 맛이 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불평도 잠시 좌측으로 조그마한 못이 나온다. 특징적이지 않은 조그마한 못인데 굳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질문하지만 이곳이 바로 포석정에 물을 공급했던 안골샘못이다. 못 자체는 크지 않지만 포석정과 연계하면 신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곳이므로 조용한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곳에서 계속 다소 지루한 길을 걸으면 좌측으로 ‘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이 있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ㄱ’자로 꺾어진 바위 면에 불좌상 삼존을 돋을새김한 매우 특이한 마애불인데 다소 큰 동남향의 바위 면에 2존의 불상을 새겼고, 보다 작은 서남향의 바위 면에 1존의 불상을 각각 새겨 삼불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불형식은 존상의 구성에 따라 삼세불, 삼신불 등 여러 경우가 있지만 초기에는 삼세불이 보편적이다. 가운데 불상의 좌측면에 ‘태화9년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음각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이 흥덕왕(興德王) 10년(835)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중앙의 본존불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상으로 상투형태의 육계(肉髻)가 머리에 비하여 유난히 높고 큼직하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턱을 각진 것처럼 표현하여 다소 완강한 느낌을 주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입에는 미소를 띠어 부드럽게 처리하였는데 현세의 석가불로 추정한다.

우측 불상은 본존불보다 조금 작고 다소 위축되었는데, 얼굴이 길고 턱을 역시 각지게 표현하여 완강한 인상을 주지만, 얼굴에는 양감이 있고 미소를 띠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왼손에 보주(藥器)를 들고 있어 약사불로 추정하기도 한다. 좌측 불상은 세 불상 가운데 조각 솜씨가 가장 떨어진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세부를 마무리하지 않고 턱이나 윤곽 등을 선각(線刻)으로 그은 채 그대로 두어 전체적인 인상은 강렬하지 않다. 835년에 조성된 것으로 구도와 비례, 형태, 양감, 선 등에서 8세기 불상과 9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다 삼불형식의 마애불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불상 삼존으로 구성된 삼불형식은 통일신라 이전의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강우방 박사는 이 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제작연대는 835년으로 신라예술사에서 모든 규범이 해체되고 양식이 흐트러지기 전에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규범적인 불상이 제작된 것은 이것을 만든 사람이 민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왕경인 경주 중심부에서 이런 불상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남산의 불교유적은 불국사처럼 왕이 직접 나선 대역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남산의 불교 관련 유적들이 다른 지역의 것들과 비교해 볼 때 민중적인 성격이 강한 이유로도 설명할 수 있다. 배리에 있는 삼존석불입상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계속 다리품을 팔면 남산의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쌓은 석성(石城)인 경주 남산신성(慶州南山新城, 사적 제22호)을 찾을 수 있다. 국가마다 방어용 성이 있는데 신라를 지키던 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이 남산신성이다. 남산신성이라는 명칭은 1935년 이래 발견된 ‘신라남산신성비’와 『삼국사기』 등에서 보인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13년(591)에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 남산신성에 큰 창고란 뜻의 장창(長倉)을 세웠다. 진평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급박한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며 문무왕 19년(679)때는 당나라의 침공에 도성을 수비하기 위한 요새로 성을 크게 수축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부분은 거의가 이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남산성은 신라의 왕궁인 월성에서 잘 보일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라 볼 수 있는데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량에 의하면 총 면적은 약 7.08㎢, 성곽길이 4.85km로 매우 큰 산성이다, 봉화대를 비롯하여 대부분 멸실된데다 드문드문 흔적만 보이고 잘 보존된 구역도 몇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을 보면 가로 50㎝, 세로 20㎝ 정도의 잘 다듬은 돌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파손된 석축 여기저기에서 석축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동틀돌(돌못)이 보인다. 이들 돌못은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에서도 보인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남산신성을 쌓을 때 사용한 석재들이 여기저기 산재한 많은 무덤의 석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간판 유산으로 똘똘 뭉친 경주지역에서조차 이런 문화재 훼손이 자행되었음을 볼 때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없는지 궁금하다.

창고용으로 사용되던 장창은 3곳으로 북문터에 중창지, 동쪽에 우창지, 서쪽에 좌창지가 있었는데 쌀과 무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놀라운 것은 창고의 규모다. 좌우창지는 길이 약 50미터, 너비 약 15미터의 건물이고 중창은 길이가 약 100미터, 너비는 약 50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다. 세 창고는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인데 화려한 꽃무늬 기와가 얹혀 있었다.

신라시대에 단일 건물로 1,500평이나 되는 창고 건물이 있었다는데 놀랄 것이다. 좌⋅우 창지는 칼⋅활⋅창 등 무기를 보관하던 병기창고였고 중창고는 군량미를 보관하던 곡식창고인데 지금도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

혜공왕 2년(767) 대공(大恭)의 난 때 불 탄 것으로 필자와 동행한 ‘경주남산지킴이’ 유정숙 회장과 함께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당시의 쌀을 골라낼 수 있었을 정도로 군량의 저장량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이곳에 풍부한 군량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적군들이 놀라 감히 도전할 염두도 못내었다는 전설도 있다. 사실 풍부한 군량미를 갖고 있다는 것처럼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성 부근에서 남산성 안에 세워졌으리라 추측되는 남산신성비가 모두 9개가 발견되었는데 발견 순서에 따라 남산신성 제1비에서 제9비라는 명칭이 붙었다.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지 않으며 제1비와 제9비만 원형인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에 적힌 글로 남산성을 쌓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 일정한 길이의 성벽을 맡아 쌓았으며, 만일 성벽이 3년 안에 무너지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맹세가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성을 쌓는데 동원된 모든 사람들이 이런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는 뜻이다. 다소 딱딱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들 비는 신라 중고기 지방통치 체제와 노동자들의 동원 체제 그리고 지방민의 신분 구성과 촌락민의 생활상을 알려주어 삼국시대의 중요한 금석문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남산성 답사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정보만으로 남산성 현장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수풀이 우거진 여름철의 경우 더욱 그러한데 남산성에 관한 한 전문가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받아 도전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안내자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더불어 남산신성은 매우 큰 산성이므로 정확한 자료를 갖고 빠른 발걸음으로 답사한다하더라도 포석정 입구에서 남산신성의 유적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장창지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데 최소한 4〜5시간 즉 낮 시간이 짧은 계절의 경우 하루를 할애해야 한다는 점이다. 답사 여정에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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