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4] 별이 된 김병화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4] 별이 된 김병화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07.05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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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앙아시아로 17만여 명의 한인들이 강제이주 됐다.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우즈벡공화국에는 7만6천525명(1만6천272가구)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강제이주 직후인 1940~50년대에 한인들은 우즈벡공화국의 북부인 카라칼팍스탄자치공화국을 포함한 26개 주와 지역들로 퍼져나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주요한인 밀집지역은 타슈켄트주의 상중하 치르치크지구와 스이르다리야주의 지구들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1천500여명의 한인 젊은이들이 코미자치공화국이나 우즈벡공화국 내의 주요 시설들에서 노동군으로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했다.

우즈벡공화국의 한인들 또한 카자흐공화국의 한인들과 유사하게 삶을 개척해 나갔다. 이주 직후의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타슈켄트주 내에는 <북극성>(‘김병화’ 콜호즈), <레닌>, <북방의등대>, <전위>, <키로프>, <몰로토프>, <새로운 삶> 등의 한인농장들이 조직되기 시작했고, 점차 극동에서와 같은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한인 콜호즈들 중에서, 특히 70평생을 콜호즈 발전에 몸담으며, 콜호즈를 공화국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은 이중노력영웅 김병화(1905~74)와 <북극성> 콜호즈의 사례는 카자흐공화국 크즐오르다주의 김만삼과 <선봉> 콜호즈의 경우처럼 독보적이다. 연해주 수이푼구역 재피고우 출신의 김병화는 18세부터 노동생활을 시작했다. 1927년에 공산당에 입당, 그해 10월에 붉은군대에 입대한 김병화는 1939년에 장기군복무를 마쳤다.

한편 이 무렵 극동지역에 있던 <북극성> 콜호즈가 우즈벡공화국 타슈켄트주의 중치르치크 구역으로 이전되어 와서 1938년부터는 이봉호가 콜호즈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예비군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김병화는 먼저 중치르칙 구역의 <새길> 콜호즈에서 건설사업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40년부터 김병화는 <북극성> 콜호즈의 대표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김병화식의 콜호즈 농업개척이 시작됐다.

김병화는 콜호즈의 농업 및 건설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들을 거두어 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1940년대부터는 밀, 벼, 채소작물 외에도 목화재배에도 착수했다. 2차대전 시기에 <북극성> 콜호즈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했고, 이를 기초로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했으며, 1944년에는 콜호즈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됐다.

1941~1945년 동안에 한인 콜호즈들은 경지면적을 3배나 늘였는데, <북극성> 콜호즈는도 약 5배로 늘여 4년 동안 1천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다. 이 기간 동안 목화와 벼농사를 위한 파종 면적은 약 10배정도 증가했으며, 1헥타르 당 17첸트네르(1.7톤)의 목화가 수확되던 이곳에 한인들이 오면서 1헥타르 당 30첸트네르씩 수확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병화의 지도에 힘입어 1946~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생산해 내었고,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이러한 농업적 성과와 김병화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소비에트 당국은 1948년 4월28일 김병화에게 사회주의 노력영웅의 칭호를 수여했다. 1948년 5월3일 김병화는 타슈켄트주 콜호즈담당 소비에트 볼코프에게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부여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고, 사회주의 농업경제의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김병화의 탁월한 농업적 조직능력과 지도력에 힘입어 콜호즈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1951년 8월 31일 콜호즈 건설과 목화 및 벼 수확고에 따른 결과로 다시 김병화에게 레닌훈장과 ‘낫과망치’ 금메달이 수여됐다. 재차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부여받음으로써 김병화는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이 됐다.

1956년에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프라브다지에 소개되면서 김병화는 공화국을 넘어서 전소련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2년에 콜호즈 내에 자신의 동상이 건립됐을 때, 김병화는 “당과 정부, 친애하고 사랑하는 콜호즈원들에게 감사한다”며 굵은 눈망울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와 발전을 거듭하던 <북극성> 콜호즈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재정적으로 빈곤한 콜호즈의 구제정책의 일환으로 현지의 타민족 콜호즈들이 <북극성> 콜호즈에 통합이 되며 다민족 콜호즈가 된 것이다. 통합된 작은 콜호즈들은 자립적인 생산지부로 됐고, 각자의 생산활동에서 독립채산제를 도입하게 됐다.

1957년 현재 <북극성> 콜호즈는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을 포함해서 총 26명의 노력영웅(25명이 한인)과 415명의 수훈자들을 보유한 우수한 콜호즈로 성장했다. 1971년대에 이르러서는 <북극성> 콜호즈에는 13개 민족의 콜호즈원들이 근무를 하고, 콜호즈 내 5개 구역에 6000명의 콜호즈 식구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콜호즈로 한 층 더 성장했다. 이중노력영웅 김병화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민족 콜호즈의 관리위원장으로서 김병화는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농업, 목축, 건축, 문화 등의 각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 내도록 하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소련당국은 김병화에게 이중노력영웅 칭호 외에, 4개의 레닌훈장과 1개의 시월혁명훈장, 2개의 노력적기훈장, 1개의 노력표식훈장 등을 수여했다. 김병화는 우즈벡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1946년도부터는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5, 6, 7, 8기 대의원으로 활동해 왔다.

74년에 <북극성> 꼴호즈의 명칭은 <김병화> 콜호즈로 바뀌었고, 타슈켄트의 한 거리와 타슈켄트주 우르타치르치크 지구 투야부구스 촌락에 있는 고등학교의 명칭에 ‘김병화’란 이름이 붙게 됐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콜호즈의 실제적인 조직자이자 1927년 소련방 공산당원이며, 우즈벡공화국 소비에트 대의원, 타슈켄트주 당위원회 위원인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 김병화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병화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지금도 그를 두고 “그는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며, 궁리 있는 관리위원장이며 예산이 좋은 주인이지요”라고 말하며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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