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가을 들녘을 거닐며
{데스크칼럼} 가을 들녘을 거닐며
  • 논설위원실
  • 승인 2010.11.2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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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 <편집국장>

 
서울을 떠나 잠시 강원도 시골로 여로에 오른다. 매연 소음 교통난, 들끓는 인파에 섞여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는 도시의 거대한 시멘트 공간을 벗어나 만추의 들길을 걸어보는 정취가 새삼스럽다.

높은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고 선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들길에는 화사한 코스모스와 소박한 들국화가 활짝 피어 맑은 바람결에 고개짓하는 모양이 귀엽다. 들길옆 냇가에도 이제 늙어버린 갈대가 흰 북숭이를 햇살에 번쩍이며 물결처럼 쓸리고 있다.

마을을 싸안은 야트막한 뒷산의 떡갈나무는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다. 집집마다 한 두 그루씩 늙은 감나무가 섰고 잘익은 감은 가지가 휜 채 촘촘하게 매달려 있다. 마당에는 고추를 말리는 그 선연한 색깔이 깊은 가을의 정서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

들녘은 추수가 끝나 그루터기만 남은 논도 있고, 노친네들이 허리굽혀 벼를 베는 모습도 보인다. 아낙네가 경운기로 볏섬을 옮기기도 한다. 통통하게 살이 찐 참새떼가 낱곡을 쪼아먹다 화르르 날아오른다.

겉보기에 농촌의 그런 평화로운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듯 예사롭기도 하다. 문명의 때에 찌들지 않은 자연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도시보다 농촌의 인구가 많았던 6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낸 세대에게는 그나마 농촌정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사계절 자연과의 막힘없는 친화, 세시(歲時)에 따른 갖가지 일화, 고향의 인정스러움과 옛동무들... 가난과 함께 대개가 힘겨운 노동을 멍에처럼 지고 살았다.

굶지않고 자란 오늘의 젊은 세대는 '낡은 일기장'쯤으로 치부하지만, 농경문화의 경험세대에게 그 시절의 가슴에는 향수가 있고 '가난했을 망정 정이 오가는 시절'로 회상된다.

그러나 계절따라 바뀌는 자연의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건만 농촌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아직 우리 세대가 살았던 옛 그대로의 농촌과 농민이 아니다.

들길을 걸으며 예전에도 흘렀던 그 냇물에는 송사리 보기가 힘들고, 길섶에는 그 흔하던 여치 하늘소 왕사마귀 베짱이 나비떼를 보기도 쉽지 않다. 이 절기면 벼포기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강아지풀 줄기에 잡아꿰던 메뚜기도 볼 수가 없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과, ‘잘 살아보세’ 라는 구호 아래 환경을 고려치 않은 무소불위의 개발정책이 자연을 파괴하며 우리의 금수강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그 폐해가 농경지는 물론 강과 바다까지 잠식시켜 버렸다.
정자터가 될만한 강변, 개발이 가능한 야산, 조림이 잘 된 임야는 이제 도회지 투기꾼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고, 농경지조차 무차별 매입하여 형질변경을 해댐으로써 농사지을 땅 조차 점점 줄어드는 모습이다.

그나마 농촌은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내가 보는 들녘에는 늙은이와 아녀자들에 의해 가을걷이가 시름겹게 이루어지고 있다. 옹기종기 끼니를 짓던 총총한 굴뚝의 연기도 지금은 두어 개 뜸하게 보일 정도로 시골은 빈집투성이고 학생이 없는 초등학교는 속속들이 폐교로 전락하고 있다.

부락공동체의 그 정 많던 삶이 무너진 농촌은 삭막한 겨울을 예비하듯 깊은 슬픔에 고즈넉이 가라앉아 있다.

문득 떠오른다. 이제 농촌은 나 같이 시골을 떠나온 도시인에게, 또 가난을 벗어나려 무작정 이민을 떠났던 많은 해외동포 1세대들에게 단지, 추억의 장소일 뿐 희망없는 적소(謫所)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먹거리 농사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중요한 주제였듯,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이 와야만이 탈(脫) 도시의 행렬이 버려진 농촌으로 되돌아 올 수 있으련만.

새삼스럽지만 이제라도 우리 민족, 우리 동포들의 뿌리인 농촌과 농민을 살리는데 지혜를 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농촌과 농민을 계속 방치하고 간과할 때 나와 내 동포들은 향수를 달랠 마음의 고향마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해외동포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가을 들녘을 걷다 보니, 불타는 단풍의 황홀함이 내일의 조락을 보는듯해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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