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가 남긴 상흔
[해외기고]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가 남긴 상흔
  • 박채순<정치학 박사, 존에프케네디 대학>
  • 승인 2014.09.04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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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광장할머니의 손자 찾은 이야기

지난 8월6일 에스텔라 데 까를로또(Estela de carlotto) 오월의광장할머니회 회장이 36년을 기다리던 외손자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이제까지 지방 도시 올라바리아에서 이그나시오 우르반(Ignacio Hurban)으로 살던 청년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36년 만에 자신의 할머니와 친척들을 찾았다. 청년은 양부한테서 받은 이름 이그나시오, 생모가 낳으면서 지어 준 이름 귀도, 생부의 성인 몬또쟈와 생모의 성인 까를로또를 종합한 이그나시오 귀도 몬또쟈 깔르로또(Ignacio Guido Montoya Carlotto)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오월의 광장 할머니들이 이제까지 36년 동안에 찾은 114번째의 손자다.

에스텔라 데 까를로또의 딸 라우라 가를로또(Laura Carlotto)는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반체제 저항 운동 조직인 몬테네로(Montoneros)에서 함께 활동했던, 오스카르 왈미르 몬토쟈 (Oscar Walmir Montoya)와의 사이에 임신을 한 후 납치됐다. 당시 23세 나이로 임신 2개월 반이 되던 1977년 11월에 군인들에 납치되어 군대 수용소에 끌려간 것이다.

그의 남자 친구 몬토쟈는 체포 후 바로 살해되었으나, 그녀는 1978년 6월26일 군인 병원에서 사내아이를 분만한 후에 바로 아기는 빼앗기고 비밀수용소(La Cacha)로 옮겨졌다. 군인들은 그가 아이를 낳은 지 두 달 후에 대로변에서 처형했고, 시체는 어머니 에스텔라 데 까를로따에게 인계했다.

36년이 지난 후에 라우라의 아들인 이 청년은 자신이 누구의 자식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입양됐는지도 모른 체, 오랫동안 친 부모로 여기고 살았던 클레멘테 우르반(Clementre Urban)과 후아나(Juna)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의심을 갖고 인권단체에 DNA 검사를 의뢰한 것이다. 유전자 데이타 은행에 보관된 실종자 가족들의 DNA검사 결과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할머니회 회장인 에스텔라 데 까를로따의 외손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 손자를 찾고 기뻐하는 5월의 광장 할머니회 회장 에스텔라 데 까를로또(우측, 사진: 일간지 Clarin제공)

5월의광장할머니회와 과거사 청산

이 청년을 찾은 할머니가 속한 아르헨티나 인권 단체인 ‘오월의 광장 할머니회’(abuela de plaza de mayo)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인권 단체인 오월의광장어머니회와 함께 군사 독재 정권에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회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분들이라면, 할머니회는 실종 당시 딸이나 며느리가 임신한 후 유괴되어 집단 수용소에서 낳은 500여명의 손자를 찾는 할머니들이 모인 단체다. 독재자들은 유아들을 탈취하여 자신이 불법 입양하거나 또는 실력자들에게 건네주었다.

1976년 3월24일 아르헨티나 군부는 ‘국가 재조직 과정’이라는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1983년 민주화 전까지 반대자들이 정부 전복을 꾀한다는 협의를 가지고 납치, 유괴, 고문하거나 비밀리에 처형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벌였었다. 이 과정에서 독재에 항거하다 사망하거나 실종 된 희생자가 3만여 명에 달한다는 민권 운동가들의 주장이다.

오월의 광장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아직 까지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반에서 4시까지 어김없이 5월 광장 탑 주위를 돌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거나 자신의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고 군사 정권의 만행에 대한 규탄을 이어간다. 한창 젊은 나이였던 그들은 이제 36년이 지나 대부분 80세의 할머니들로 어떤 악조건에서도 자식을 안아 보지 못하고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계속해서 군사 독재 시대의 역사 청산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 할머니회는 수차례에 걸쳐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는데, 제 20대 아르헨티나 한인회에서도 이 추천에 동참한 바도 있다.


▲ 5월의 광장에서 침묵 시위하는 할머니, 어머니들 모습
이런 상황에서 아르헨티나에는 유전자를 통한 가족 찾기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소재 국립 두란 병원(Hospial Duran)에 1987년에 국립유전자 데이타 은행(Banco Nacional de Datos Genéticos)을 설치하여 실종자들의 친척들의 유전자를 채취하고 다량 보유하고 분석하여, 그 동안 법의학적(Forensic)으로 많은 경험과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의 1980년 광주 항쟁 중에 발생한 실종자를 찾기 위해 광주항쟁 5.18유족회에서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현장을 체험하고 전문가와 교류를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 전쟁 당시 남북으로 이산된 가족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고령화되는 이산가족들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유전자 데이터를 작성한다는 정부의 발표도 있다.

민주화 후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1989~1990년 알폰신 정부에서 군의 혼란과 적대적인 태도를 유발하지 않기 위해 ‘전 국가사회 화해’라는 명목 하에 1986년에 ‘최종기소 중지법(Ley de Punto Final)’을, 1987년에는 ‘의무 복종 면책법(Ley de Obediencia debido)’을 제정하여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두 법은 군사정권 시절 탄압과 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줄여주는 법률이었다. 알폰신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메넴 대통령 시절(1989~1990)에도 군인에 대한 강경책을 사용하지 않고 알폰신 정부에서 마련한 두 법에 의해서 1989년에 국가화합차원이라는 명목으로 39명의 군부 인사들을 포함한 289명에 대통령 특별사면령을 내린바 있다. 그러나 2003년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군에 대한 태도를 더 강경하게 취했다.

즉 알폰신과 메넴은 화해라는 명분으로 범법 군인에게 면책과 사면을 해 주었던 데 반해, 젊은 시절 몬토네로 운동가 출신이며 민주화가 고착된 후라는 상황에서 군에 대한 강경책을 구사했다. 즉 그는 2003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전 군사 정권에 대하여 재조사를 천명하고, 2004년 8월 국회에서 두 사면법을 폐기하고 정지되었던 군인들의 죄를 다시 물었다.

아르헨티나 과거사 청산 작업은 브라질 군사정권 말기인 1979년 사면법을 제정해서 1961∼1979년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에 대한 처벌을 금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까지도 군정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단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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