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2·8독립선언과 백관수
[전대열時論] 2·8독립선언과 백관수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5.02.0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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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수없이 많은 일을 겪게 되지만 그것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경험한 일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천재로 칭송받을지 몰라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슬픈 일, 괴로운 일, 미운 일처럼 부정적인 감정경험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머리통은 빠개져 나갈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두뇌의 칩은 물량적 요소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어서 일단 회로 속에 모든 것을 잡아 넣어둘 수는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강약에 따라서 버려야 할 것은 미련 없이 버리게 된다. 그리고 남는 것이 ‘기억’이다.

그러나 기억은 언제든지 끄집어내 사용할 수는 없고 필요한 때에 적절하게 튀어나와 생활의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과 같이 우리의 엔돌핀을 샘솟게 만드는 기억은 우리가 애써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 삶의 활력소다.

그 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행했던 수많은 행적을 후손들로서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이처럼 건재하고 삶이 이처럼 풍요로울 수 있는 토대는 선조들의 희생과 끈질긴 투쟁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8독립선언을 기억하는 것은 민족의 성원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2원8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하고 물었을 때 과연 올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1919년 2월8일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거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는 망연자실(茫然自失)할 수밖에 없음을 자탄하게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3·1독립선언이 우리 민족 전체의 뜻을 모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 국민이 일어나 엄청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2·8의 역사적 의의는 상당부분 3·1정신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3·1운동에 앞섰던 그 정신까지 후손들이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2·8선언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대표 11인이 600여 명의 학생을 동경 YMCA에 모아놓고 조선독립선언을 외쳤던 날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20일 전이다. 독립선언서는 훗날 소설가로 문명(文名)을 떨친 춘원 이광수가 기초하고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가 낭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2·8독립선언을 연구한 학자들은 리더십이 뛰어난 백관수가 춘원이 쓴 선언서를 손질했다고 하고, 거꾸로 백관수가 기초하고 이광수가 손질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는 육당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를 만해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추가했다는 설과 매우 상통한다. 선언서는 학생대표 또는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것이어서 대표들끼리 돌아가며 고쳐 쓰기를 거듭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누가 기초를 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2·8선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장하고,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정확하게 적시하고 있다.

국제정세의 흐름이 민족자결에 의한 해방에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강점으로 얻은 이익을 반환하고 원상회복시켜야 하며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조선민중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피로써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계열강의 가슴을 뜨끔하게 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2·8과 3·1독립선언서는 춘원과 육당이라는 최고의 청년 문필가들이 기초를 잡았다고 하지만 백관수 한용운 같은 기개 있는 인사들의 손을 거쳐 청사에 빛나는 역사적 문건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춘원과 육당은 둘 다 모두 일제말기의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민족의 지탄을 받았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등 시인으로서도 일가견을 이뤘지만 백관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언론인으로 살아갔다.

그 역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활약하며 친일했다는 항설(巷說)에 시달렸으나 구체적 사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백관수는 인촌 김성수와 더불어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등과 국가 운명을 걱정하며 날을 지새웠다.

광복 후에는 향리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하여 헌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유진오가 초안을 만든 헌법을 심의하는 법제사법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의원은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 19대 국회의원을 포함하여 가장 수준이 높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승만에 반대한 백관수는 2대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곧 이어 터진 6.25사변 때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리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평양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풍채도 당당했지만 주위인사들에게 탁월한 지도자로 각인되었으며 따르는 이들이 즐비했다.

독립, 언론, 정치활동으로 빛나는 백관수를 재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후배 언론인들이 주관하여 2원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철승은 축사를 통하여 백관수의 인품과 신념을 소개했으며 신복룡·정진석·안용환교수 등의 연구발표는 백관수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안겨줬다. 특히 안용환 박사는 다른 학자들이 찾지 못했던 당시의 신문보도를 발굴하는 열성과 함께 창의적인 연구 자세를 보였다.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는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국가기념일 제정도 국회에서 의결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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