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
[전대열時論]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5.04.20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외국의 침범을 한 번도 받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에는 이웃나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 아예 속국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세계적 강국으로 이름났던 과거의 제국들도 모두 이러한 국가적 고난을 겪어왔다. 자신들이 당했던 쓰라림을 다른 나라에 전이시켜 똑같은 야심과 만행을 보여 온 것이 인류역사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바다 건너에는 일본이라는 해적국가를 두고 있는 한반도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치열한 경쟁을 치르며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다.

고구려 같은 강성한 나라였을 때에는 수나라 대군을 청천강에서 몰살시키고 당나라 침략군을 안시성에서 쫓아낼 수 있었지만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대에 들어와서는 급격한 국력축소로 약소국을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명맥은 걸핏하면 침입하는 오랑캐 중국의 힘에 짓눌려 조공을 바치며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전긍긍해야 했다. 게다가 끊임없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倭寇)들의 발호에 대마도를 정복하는 기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임진왜란 7년을 겪으며 국력은 극도로 쇠잔해졌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외적의 침범에 대항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삼별초의 끈질긴 저항도 시도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조정대신들과 임금의 무능은 결국 조선조말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를 간파한 전봉준장군의 동학혁명 궐기는 한 때 조정과의 협의를 거쳐 전국 감영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일본군을 끌어드린 왕정의 배신으로 공주 우금치에서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일본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결을 이용하여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에 대한 확고부동한 기득권을 갖게 된다. 특히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협정을 맺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자의 지분을 인정받는 노골적인 나눠먹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을사늑약은 조선강점을 위한 최후의 주권약탈이었으며 이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 조선 군인들은 총을 들고 반항했지만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일패도지하고 만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싸우고 할복자결을 하는 등 조선인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지만 제국주의 강국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국인으로서 조선과 중국 등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선교사로 파견되었거나 의료를 내세우며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땅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으며 교회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민중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도록 쉼 없이 노력했다.

비록 특정종교의 선교를 목표로 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조선의 독립운동이나 인적개발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각급학교를 세우고 현대교육에 이바지한 공로도 크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세브란스 등 전국적으로 기독교계를 이끈 외국선교회의 활동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조선민중을 개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한 저항정신도 살아나게 되었고 독립운동의 싹도 크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이러한 선교중심의 운동과 달리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선생은 중국의 단동에서 기선(汽船)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분이다. 광복회에서는 4월15일 백범기념관에서 한철호 교수를 초청한 학술강연회에서 조지 쇼의 독립에 끼친 공헌을 집중 조명했다. 이경선시인은 ‘일송정 푸른 솔’을 낭송하여 존경을 표했다.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는 1880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일본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며느리도 일본인이어서 가족관계로 치면 전적으로 친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해서는 철저한 저항정신을 보여줬다. 그는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꼭 필요한 무기를 자신의 소유 기선에 실어 날라주는 엄청난 도움을 줬다.

출판물과 자금까지도 지원하거나 보관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경찰은 온갖 정보망을 통하여 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다만 영국인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침범할 수 없어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차에 쇼가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눈엣가시였던 영국인을 체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왜경은 그를 체포했다. 내란죄로 기소되어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영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굴복하여 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그는 석방 후에도 더 많은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펼쳤다.

상해에서 김구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그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영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 출신이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저항정신이 상통하지 않았나 하는 연구도 있다. 아무튼 그의 애정과 호의는 단순한 독립운동 지원보다도 훨씬 한 단계 높은 인류의 보편적인 자유와 정의 그리고 세계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