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85] 덕수궁
[아! 대한민국-85] 덕수궁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5.05.01 0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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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2014년 10월13일, 서울 한가운데, 도심 속의 돌담길로 우리에게 익숙한 덕수궁의 석조전이 「대한제국 역사관」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9대 임금이었던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사저였지만 임진왜란(1592)때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환도하여 임시 거처로 쓰면서 궁(宮)이 되었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1894년 7월, 일본은 조선을 전쟁터로 삼아 청일(淸日)전쟁을 일으키더니, 그 이듬해 10월에는 왕후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1896년 2월에 고종은 왕비가 시해당한데다 여전히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경복궁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1897년 2월, 외국공관에 왕이 머무르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던 백성과 독립협회 등은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고종은 그해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경운궁으로 향했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왕과 왕실의 권위가 바로 서며 이 나라가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당당한 나라라는 뜻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그해 12월 12일에 대한문 앞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시해된 왕비를 황후로 추존하여 2년만에 국장을 지내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광무개혁’을 발표한다. 이 같은 계획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구상했던 것으로, 그 기간 동안 중화전, 함녕전 등 몇 개의 중심건물을 완공하면서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경운궁을 확정한 것이다.

‘대한’은 위대한 한민족이라는 뜻으로 ‘한(韓)은 삼한시대부터 쓰인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고유한 이름이었다.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하여 나라의 산업을 발전시켜 근대화를 서둘러 이루려고 하였다. 이처럼 경운궁에는 고종황제의 절절한 극일(克日) 독립의지가 서려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그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는 비운을 맞는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13년 남짓 존속하다가 역사 속에 사라졌다.

경운궁(덕수궁)은 다른 4개의 궁궐과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문 앞에 크지 않은 광장을 만들고, 거기서 도로가 여섯 갈래로 뻗도록 길을 새로 내고 확장했다. 19세기 후반 서양열국의 수도에 유행한 방사상 도로체계가 대한제국의 본궁 앞에 도입된 것이다. 석조전은 1898년 영국인 건축가가 대한제국 황궁으로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한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최근까지 미술관, 박물관, 궁중유물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104년 만에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아 대한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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