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98] 징비록(懲毖錄)
[아! 대한민국-98] 징비록(懲毖錄)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5.11.1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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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책으로 곤색 천으로 표지가 되어있는 세로 27cm, 가로 30cm, 두께 4cm, 1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하였던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난 후에 파직 낙향하여 7년간의 전란을 겪은 데 대한 참회와 반성을 기록한 책이다.

유성룡은 서문에서 “시경에 지난날의 잘못을 거울삼아 후일에 일어날 환란을 경계하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 책을 저술한 까닭이다.”라고 밝혔다.

안동의 하회마을에서 자란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고 임진왜란을 겪는 과정에서 조정의 중심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술한 책으로 저자의 손으로 된 관계문서와 함께 저자의 자서(自敍)와 자발(自跋)이 붙어있고, 또 녹후잡기(錄後雜記)라는 징비록의 추가기록 1편이 들어있다. 이 책은 1633년(인조11년) 유성룡의 아들 진(珍)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할 때 거기에 수록하였고, 10년 후에 다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1695년(숙종21년, 일본 元祿,8년)에는 일본 교토(京都) 아마토야(大和屋)에서도 출간하였다. 1712년(숙종38년)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반출을 엄금할 것을 명령한 일이 있다.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안동, 하회의 종가 소장본인 저자 자신의 필사본을 조선사료일총간 제11집에 「초본징비록」이라 하여 3백부를 영인한 일이 있다. 국보132호는 저자 필사본 「징비록」이다. 유성룡은 당시 동북아 3국의 정세를 비교적 소상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하여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전란에 대비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는 당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매사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경우라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만일 지금 준비하지 않는다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징비록에는 이렇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의 정세와 일어난 다음의 일, 그리고 정유재란의 발발과 7년간의 전란이 끝나는 날에 이르는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을 연구하는데 있어 대표적인 기본 사료가 되고 있다.

백성들의 딱한 사정이라든가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와의 갈등 등 유성룡 스스로가 보고 들은 바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징비록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성으로 쓰여있어, 문학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인 유성룡의 재능과 인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특히 저자의 능문(能文)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붙들면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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