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칼럼> 겨울 들녘에 서서
<박완규칼럼> 겨울 들녘에 서서
  • 월드코리안
  • 승인 2011.01.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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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때마다 겨울 들녘을 가로질러 산으로 향한다. 찬 바람에 시린 손을 비비며 걷다 보면 햇살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고 구둣발에 밟히는 메마른 대지의 감촉이 뒷덜미까지 차갑게 전달된다.

그러면서 내 정신과 몸 구석구석 헐렁하고 뒤숭숭해져 버린 곳에 어김없이 칼바람이 밀고 들어와 얼음찜질을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세상 속에 부대끼면서 열나고 부었던 몸이 차츰 가라앉고 아프게 맺힌 기억이 스르르 풀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보이고 세상과의 거리가 느껴지면서 냉정을 되찾게 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대표작 ‘해변의 묘지’는 이렇게 사물이 죽어버린 자연 속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삶의 엄격성을 터득한 듯하다.

겨울 벌판은 흡사 묘지와 같다. 봄의 향기도, 여름의 풍성한 잎새들도, 가을의 황금빛 물결도 모두 서릿발 같은 대지의 냉정한 기운 아래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여전한 햇살과 맑은 공기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일기장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부패한다.”

인간이 도시를 세우고 문명의 편리함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몸이 약화되고 정신이 조금씩 부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라고들 말하지만 다들 그렇게 출근길을 찾아 헤매고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잠들 집을 찾아든다.

이 과정에서 벌여야만 하는 세상과의 힘겨운 싸움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무제한 난타전 양상이다. 이런 이전투구의 인생이 문명을 이루고 역사로 기록된다면, 겨울 논두렁은 역사를 비껴가는 또 하나의 길일 것이다.

이 길은 봄의 유혹도, 여름의 열정도, 가을의 풍요도 모두 사라져 버린 자연의 모습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거의 사라져 버렸으므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구둣발 소리와 귓불을 발갛게 데우는 바람 소리만 들린다.

그러면서 부패하고 있는 자신의 몸과 정신이 살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뒤뚱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어느 부위가 고장나 있는지 발견하게 되고, 온갖 망상들이 떠올라 차가운 공기 속으로 빠져나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겨울 산책은 바로 이런 자기 정화의 길을 걷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유럽인들은 산책을 삶의 필수적인 습관으로 받아들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도시의 교통망 속에서 산책길을 잃어버리고 있다. 도시는 차들로 넘치고 땅 밑까지 지하철 인파들로 득실거려서 흙을 밟고 걷는 느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걷는 시간은 급속도로 짧아진다.

걷는 행위조차도 계단이나 복도에서 누군가를 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걷는 도중의 사색과 자기 성찰의 시간은 없어진다. 간혹 누군가가 도시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하더라도 오염된 공기와 각종 소음들 때문에 맑은 사색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번잡한 도시를 떠나 이름 없는 벌판의 논두렁 길을 걷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즐거운 국외자이며 스스로 선택하는 역사의 방관자가 된다. 나는 문명과 역사 그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걷는 것이다.

길게는 100년이 넘도록 소외되고 괄시를 받던 해외 한인 동포 사회가 늦게나마 참정권 회복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당연한 권리를 부여 받은 데 대한 자긍심도 크겠지만 한편으로 선거권을 행사할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정치권의 표밭으로서 정치세력화 하려 하고 이에 편승해 권력욕에 사로잡힌 몇몇 한인들 모습에서 씁쓸한 비애마저 느끼게 한다.

그렇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나의 겨울 들녘 산책은 은연중에 발걸음이 깊어진다. 역사적 전환기는 새로운 희망과 기대,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교차하는 민감한 시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계 각 교민사회 한인들의 의식과 정서상태가 오히려 흔들리고 불안해지기 십상이다.

이 민감한 시기에 약삭빠른 걸음거리로 바삐 움직이거나 불안한 심정으로 방구석에 틀어 박혀 있는 모든 해외 한인 동포들에게 언필칭 겨울 벌판으로 나가기를 권유하고 싶다. 세상 눈치보면서 성급한 기대나 박탈감을 가지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향해 한번 걸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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