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백세시대의 명암”
[안영수의 문화칼럼] “백세시대의 명암”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6.08.3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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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10여 년 전에는 회식자리에서 ‘9988234’라는 건배사가 유행했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 3일 아프다가 4일째 되는 날 세상을 하직하고 싶다는 바램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느 무명가수를 일약 유명 스타로 만든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대세다. 노랫말이 자못 파격적이다.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거든…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거절이 2절까지 이어지고 끝에는 흥겨운 아리랑 멜로디가 나오는 트로트다.

60세부터 시작해 150세까지 이어지는데 화자가 저승사자에게 죽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0세는 ‘아직 젊어서’, 70세는 ‘할 일이 아직 남아서’, 80세는 ‘아직은 쓸 만해서’, 90세는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100세는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하라는 메시지다.

왜 이런 발칙한 노랫말이 나왔을까? 저승사자에게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엎드려 빌어도 시원치 않은 인간이 감히(?) 반기를 드는 내용은 어쩌면 한국인의 수명이 OECD 국가들 가장 짧은 기간에 늘어나서 죽음조차 거부하면 장수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1970년대만 해도 부모님들이 환갑이 되면 자식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아서원’이나 ‘신흥사’ 같이 커다란 장소를 빌려 기생까지 불러 거창하게 잔치를 차려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였다. 필자도 1975년에 유학에서 돌아와 시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빚을 내서 했다. 환갑이 이럴진대 부모님의 고희는 집안의 큰 경사여서 잔치를 더 크게 벌리곤 했다.

통계에 의하면 1970년의 평균수명이 61.9세였던 한국인이 2013년에는 81.9세가 되었다고 한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국민의료보험이 정착되고 높아진 건강에 대한 관심과 의료 수준의 향상이 이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밤낮 없이 몸에 좋다는 온갖 건강기능 식품이 소개되어 그 종류만 해도 250여 가지가 넘는다는 통계도 나왔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수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인삼과 녹용은 전통적인 보약이고, 산에 덫과 올무를 설치해서 뱀은 물론 다른 동물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동남아 여행을 가서도 몸에 좋다는 것을 닥치는 대로 먹는 행태는 거의 몬도가네 수준이다.

암에 대한 연구도 획기적으로 발전해 암세포를 죽이는 표적치료제가 개발돼 완치율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DNA를 분석해 발암 요인이 되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수술이 성행해 유명한 안젤리나 졸리도 유방을 제거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며칠 전 뉴스에서는 중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의사들이 원숭이 머리 이식 수술을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검은 색 원숭이와 흰색 원숭이의 머리가 각각 바뀐 그림은 그로테스크했다. 도대체 인간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21세기의 드라큘라가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장수가 반드시 축복인 걸까?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기간을 의미하는 건강수명은 2012년 66세로 같은 해의 평균 수명(81.4세)보다 15.4년이 낮다는 통계를 보면 노년에 평균 약 15년을 질병에 시달리다 끝난다는 것이다. 유엔의 세계인구고령화 보고서에서 100세 이상 장수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왔다고 이를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라고 정의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인간 수명의 100세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축복일 수만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칠십을 넘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일흔을 넘기면서 항상 삭신이 쑤신다고 불평하셨듯이 나도 목, 어깨, 허리, 무릎 등이 쑤시고 아파서 병원 출입이 중요한 일과가 된지 오래다. 아프지 않고 오래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마는 대부분은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비단 현대인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기원 전 희랍 신화에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의 비극적(?) 욕망을 다룬 인물들이 나온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이 쓴 시 ‘티토노스(Tithonus)’는 트로이의 왕자였는데 새벽의 여신 오로라(Aurora)의 사랑을 받아 연인으로부터 영원히 사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젊게 사는 것을 요구하지 못해서 죽을 자유를 잃고 시들은 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늙은 채 사는 고통을 호소하며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삼라만상의 순환을 부러워하며 오로라 여신에게 죽을 권리를 달라고 애원한다.

죽을 권리를 갖고 있는 자들은 행복하여라
풀이 무성한 무덤 속의 사람들은 더 행복하리라
나를 놓아다오, 그리하여 무덤으로 보내주오.

테니슨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유명한 시인 엘리엇(T.S. Eliot)도 ‘황무지(The Waste Land)’의 에피그라프에서 현대인의 정신적인 죽음을 암시하며 로마의 시인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의 소설을 인용했다. 주인인 트리말키오가 손님으로 초대한 아가멤논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쿠마에의 무녀 시빌(Sybyl)은 젊었을 때 아폴로 신의 사랑을 받아 예언의 힘과 함께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생명을 얻었지만 그녀 역시 영원한 젊음을 요구하는 것을 잊었다. 그 결과로 그녀는 늙어서 몸이 오그라들어 작은 항아리 속에 넣어져 전국의 이곳저곳에 전시되어 구경거리가 됐다. 동네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라고 놀리자 그녀는 “죽고 싶다(I wish to die)”고 대답한다.

건강 수명이 아닌 단순한 수명 연장을 한다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앙이다. 식물인간이 돼 온 몸에 수십 개의 호스를 꼽고 중환자실에서 십 여 년 이상을 보낸다면 가족들의 의료비 지출과 의료보험료 수가를 올릴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잔인한 일이다. 그러다가 병원 침대에서 쓸쓸한 임종을 맞는 것보다는 옛날 우리의 선조들처럼 오랫동안 살던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과 하직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는지… 정부가 내년부터는 연명치료를 중단할 법을 제정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이다. 어느 누구도 이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 장년과 노년으로 이어져 마지막은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는다. 우리는 이 과정을 피하지도, 건너뛰지도 못한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러 동남동녀 3천명을 한반도를 포함한 온 천지에 보냈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백세 인생’이란 가요는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의 패러디이다. 주어진 생애를 보람 있게 소진하고 소리 없이 스러져가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형기의 시 ‘낙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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