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햇살에게”
[안영수의 문화칼럼] “햇살에게”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7.03.2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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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남편이 심장혈관 조영시술을 받는 날이라 입원수속하기 위해 아침 일찍 딸과 함께 병원에 갔다. 나이가 많으니 여기저기 고장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지금까지 입원할 정도로 아픈 적이 없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오전에는 자기가 있을 테니 집에 가서 쉬다 오후에 오라는 딸의 배려가 고마워서 남편이 시술할 때 오마고 하고 어두운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원을 나서니 눈이 부셨다. 어제까지 겨울의 결기가 남아 피부 속으로 파고들던 바람이 어디로 갔는지 따사로운 햇빛이 봄이 왔다고 신고식을 한다. 문득 정호승의 시 <햇살에게>가 생각났다.

이른 아침에 /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 하루 종일 /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은 ‘먼지’처럼 쓸모없고 유한한 존재이지만 살아서 햇빛을 받으며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짧은 이 시가 오늘따라 마음에 와 닿는다. 늙어서 병원에 갇혀 있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햇살의 유혹에 이끌려 지하철역까지 걷기로 하고 50여 년 전 남편과 연애할 때 오가던 골목길로 들어섰다.

대학가의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지만 헤매다보면 차가 다니는 큰 길로 이어진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그와 나는 가난의 무게가 힘겨워 결혼을 앞두고 참 많이도 망설이고 고민하며 이 골목들을 누볐다. 옛날의 다닥다닥 붙었던 초라한 주택들은 간 곳이 없고 다가구주택들이 들어섰지만 좁은 골목에 선 전봇대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그와 나는 나무로 치면 고목이 되었는데…

집에 와 한숨 돌리며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이정미 재판관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인용문을 읽는 장면이 나왔다. 지난해 가을부터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통령과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 그리고 촛불집회로 표출된 국민들의 저항이 마침내 대통령의 탄핵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 나도 남편과 집안일보다 이 나라의 파국에 울분을 터트렸다. 이제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강력한 리더십과 소통능력을 갖춘 대통령을 뽑아 강대국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국가안보와 경제 문제를 제갈량의 지혜로 풀면 좋겠다.

지난 겨울에는 남편이 평소와 달랐다.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누워만 있는 그가 미워서 잔소리를 하면 그게 발단이 돼 큰 소리가 났다. 자주 티격태격하게 되니까 차라리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 ‘졸혼’(卒婚)이 유행이라지 않는가. 나도 ‘졸혼’을 해버려?

남편과 다툰 날 저녁이면 딸네 집에 가서 서로 흉을 보면, 딸이 늙은 부모의 카운셀러가 되어 제발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다. 그러다 지난 연말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 그의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각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주 심장 전문의한테 갔더니 방치하면 심근경색의 위험이 있으니 당장 입원해서 심장혈관 조영술을 받으라고 했다. 남편이 지난 몇 달 동안 움직이기 싫어했던 것은 심장의 이상 때문이었나? 남편이 아프니까 겁이 난다. 평생 내가 잔병치레를 많이 해 입원도 여러 번 했지만 남편은 검사하기 위해서 하루 정도 입원했을 뿐 병으로 입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럽다.

입원 전날 저녁, 딸네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남편에게 제일 살갑게 구는 열 살짜리 손녀가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제일 좋아하는 돈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더니 손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할 - 머니.”
손녀의 아재 개그에 식구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니랑 싸우지 마시고 사이좋게 지내세요.”

헐! 손녀까지 우리 부부가 다투는 게 신경 쓰였나보다. 나이 탓인지 요즘 내 주변에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아파서 심란하다.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으로 떠나는 내 마음 속에 애송시(愛頌詩)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영국의 시인 오든(W.H. Auden)의 <자장가(Lullaby)>라는 시다. 시의 내용은 세상이 시끄럽고 제각기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인은 사랑에만 몰두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시의 세 번째 연에서 화자(話者)는 자기 팔을 베고 잠든 연인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확신과 충성심은/ 종의 진동처럼/ 한밤중 시계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유행을 쫓는 미치광이들은 외친다/ 현학적이고 지루한 소리들을.
끔찍한 트럼프 카드가 예언한 대가를 모조리 갚아야한다고.
그러나 오늘 밤부터는 그대의 작은 속삭임, 생각, 그리고
단 한 번의 키스와 눈짓조차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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