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안타까운 사할린 동포들의 고단한 삶
[현장에서] 안타까운 사할린 동포들의 고단한 삶
  • 현성식 기자
  • 승인 2010.07.16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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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3월 영국 해협 일대에서 독일 잠수함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 시기 전쟁물자 등을 실은 연합군측 선박을 무려 108척이나 침몰시켰다. 이를 호송하던 전함도 21척이나 파괴됐다. 연합군 측으로선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영국정부와 연합군을 구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이가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이다. 그 어렵던 독일군 암호를 해독했던 것이다.

같은 달 21일부터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독일군 잠수함들의 위치와 공격계획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찼기 때문이다.

영국정부는 갑작스런 변화에 독일군이 눈치를 챌까봐 별도의 전쟁 시나리오를 짜야 했을 정도다. 그가 있었기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모든 해상 작전 등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의 공적은 비밀에 부쳐졌다. 영국정부는 튜링에게 공로훈장을 주면서도 서훈 사유는 숨겼다. 처칠은 튜링 덕에 전쟁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도 자신의 전쟁 회고담에 그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볼프 슈나이더의 ‘위대한 패배자’).

특히 영국 정부는 1952년 그가 동성애를 인정하자 외설죄로 다스리며 여성호르몬을 맞도록 하는 ‘화학적 거세형’에 처했다. 게다가 범죄자에게 국가 기밀을 취급하는 일을 맡길 수 없다며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시켰다.

이런 수모를 당한 끝에 2년 뒤 그는 자살한다. 지난해 9월 당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튜링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그가 무덤에서 어느 정도 위안을 얻었을 지는 의문이다.

일제 강점기 조국을 떠난 한국인과 그 후손들은 튜링과 비슷한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 누군가의 얘기처럼 “길을 떠나면 조국이 보이는 법”이어서 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나름 헌신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잊혀 졌을 뿐이지, 그 공은 분명 혁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국과 고향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무관심이었다. 보상은커녕 위로조차 받지 못한 죽음 또한 얼마나 많았을까.

최근 제주를 찾은 제주출신 사할린 동포와 출향 해녀들도 이와 비슷한 섭섭함이 있음직하다. 그러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은 한 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표현으로 그 설움을 숨겼다.

이들이 밝힌 삶은 슬픔의 덩어리였다. 또한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핍박을 딛고 우뚝 일어선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그렇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단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줄 마땅한 방법은 없을까.

<제주=현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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