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문학 산책] 역설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부서방의 눈물
[장인우의 문학 산책] 역설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부서방의 눈물
  •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05.0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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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실 때에는 소리 내어 읽어보십시오. 하루 내내 수도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던, 형체도 없는 생각들의 잔형, 그 낱낱으로 인해 상처받던 시간들을 위로하듯, 지금 가슴에 한 모금 물을 흘려보내 그 물이 피를 타고 흐르고, 뼛속 골골이 맺히다가 다시 흘러, 한줄기 눈물로 볼을 타고 내린다면 남은 시간들은 오늘의 체취가 되고, 내일의 숨결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명희님의 ‘혼불’은 소리 내어 읽으면 그대로 한 편의 서사시, 서정시로 살아날 것입니다.(필자 주)

“청아암 부이인 보오옥(復).”

조금 전까지 부인이 입고 있다가 금방 벗어 놓은 옷, 부인의 땀과 체취와 숨결이 배어 있는 저고리, 흰 적삼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간 인월댁은 북쪽 하늘을 향하여 섰다. 마치 부인이 아직 살아 있을 적, 서로 고요히 눈을 마주치던 그 마지막 순간에 나눈 기운을 다시 나누 듯 숨을 모아 적삼을 활짝 펼쳐 들었다. 

왼손으로는 적삼의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 허리를 잡아 허공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캄캄한 겨울밤 하늘에 흰 적삼이 선연하게 나부낄 때 인월댁은 저 깊은 속 골짜기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로 “청아암 부이인 보오옥”, 청암부인의 혼을 목 메이게 불렀다. 망자의 혼을 애타게 부르며 슬픔에 침전되어가는 속에서도 집 안팎의 종들과 머슴, 호제들은 마당에 화롯불을 담아내고, 음식들을 만들고 내어 오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큰사랑, 작은사랑에 그득 들어앉고도 모자라 사랑마당, 중마당, 안마당에 차일을 몇 개씩 친 곳마다 문상객들이 그득 들어앉아 애통한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청암부인 초상 마당에 허청걸음으로 넋이 나간 듯 비칠거리며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남루하게 기워 입은 저고리 동정에 기름때가 거멓게 절어든 행색으로 들어와 제 가슴팍을 갈퀴 같은 두 손으로 움키어 쥐어뜯으며 머리를 땅에 박고 통울음을 울었다. 가까운 대소가 사람도 아니고, 문중의 일가도 아닌데 그토록 애통하게 절분(切忿)이 뒤엉킨 울음을 운다는 게 믿기지 않은 사람들은 놀라 웅성거리는 가운데, 사내가 가까스로 진정을 하며 더듬더듬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는 아랫몰 사는 부서방인디요오, 청암 마님께 설에는 반드시 세배를 허고, 지 잘못을 용서히 달라고 빌라고 했구만이요. 근디 지가, 이 못난 놈이 매급시 도둑놈이라능거이 들통날깸시 인사도 못 디리고, 또 병환 중이시라 찾아 뵙도 못허고, 영영 기회를 놓쳐버렸구만요이.

작년 여름 그 더운 염천에 저희 아낙이 또 새끼를 낳았구만요. 지는 본시 할아버니 때부텀 서원에 하사된 노비로 살어왔다가, 서원이 훼철 되면서 상민으로 속량이 되었구만요. 오갈디 없는 것이 노비 신분이고, 저만이 아니고 자식새끼들까장, 그 아래 자식들까장 대대로 물림허는 것이 노빈디, 깨깟이 벗고 상민이 되얏으니 을매나 좋았겄어요. 참 좋았구만요. 미치도록, 그 자리서 콱 베락마저 죽는다혀도 원이 없을 거맹이로 좋았구만요. 그러먼 처자식들 데리고 떴어야 될 것인디, 송곳 꽂을 땅 한 뼘 없는 신세가 이렇다 할 성짜도 없는 풀뿌리같은 이 목심들이 고향이랄 것도 없어, 기양 이 마을에 타성바지로 쌀 속에 낀 뉘마냥 껴 살었구만요.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어요. 삼순구식도 못허는 신세는, 저만이 아니고 온 동네사람들 태반이 다 그렇고, 양반이라 혀도 살림이 구차한 집들은 다 그 모양에서 크게 달르지 않으니, 그것이 당연한 이친중 알고 살아보려혔어요. 

근디, 그날은 열 달 동안 소나무 껍질 벗겨 서속 넣고 죽 끓여 먹은 것과 쑥 캐다가 물 붓고 끓여 먹은 것 말고는 곡기라고 언제 한번 제대로 입에 대 본 일 없이, 허구헌날 빈 속에 일만 허든 사램이 포도시 애기를 낳아 놓고는 지쳐서 나가 떨어졌어요. 그러고도 자식새끼는 지 에미 빈 젖마저도 빨 힘조차 없는지 새새끼 주둥이보다 작은 입을 노랗게 벌리고 시꺼멓게 까무러져 내리는디, 순간, ‘도둑질인들 못해 와 …….” 생각이 들었어요. 눈에서 퍼어런 불이 일었어요. 불같이 밖으로 뛰어나가 더덕더덕 기운 자루 하나를 손에 들고 청암 마님 광까지 왔구만요. 

그믐날밤이었어요. 하늘은 고맙게도 달도 별도 띄우지 않았구만요. 달도 별도 없는 칠흑같은 어둠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지 같은 허뱅이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하늘은 고맙게도, 그날만은 지를 역성이라도 들어주는 것 마냥 그림자까지 감추어 주었구만요. 광 앞에서 가슴은 떨리고, 손은 가슴보다 더 떨리는데, 잡혔어요. 뭉툭하면서도 묵직한, 썬득한 찬기가 소름 돋게 하는, 그것이 손에 잡혔어요. 

‘여기구나.’, ‘바로 찾았구나.’ 아아, 그러나 무겁게 잠긴 광의 쇠통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굶주린 창자에 허여멀건 허뱅이 너, 부서방!”
‘절거덕, 절거덕.’, ‘잘그락, 잘그락’ 소리만 낼 뿐 요지부동 열리지 않는,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흐르는. ‘철거덕, 철거덕.’
“누구냐.” , “웬 놈이냐.” 청암 마님의 목소리는 낮았습니다. 
“마님.”, “살려줍시요.”, “살려줍시요.” 
자꾸만 목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오금 저리는 소리로 ‘살려 달라’ 했는데
“따라오너라.” 겁에 질린 채로 따라 들어가면서도 이대로 광에 갇혔다가 덕석말이로 죽을까,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조리돌림으로 죽을까, 회술레로 죽을까, 내가 죽으면 내 집 자식들은 모두 어찌 될까, 눈앞이 캄캄했구만요.
“지고 갈 수 있겠느냐.” 
“예?”
“네 기운에 이것을 지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느니라.”
“지고 가거라.” 등롱 불빛에 비친 가마니에 수북이 쌓인 흰 빛깔은 쌀이었습니다.
“그러고, 네 일생 동안 아무한테도 오늘 일은 말허지 말아라.”
얼른 입은 떨어지지 않고, 온 몸은 그대로 얼어 땅에 붙어버린 것 같은데, 그날밤, 그믐날밤, 칠흑같이 어둡던 밤, 어푸러지고 넘어지고, 눈물은 흘러 가슴팍으로 밀려 내려오는데, 그 쌀은 그냥 먹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도둑놈인데, 청암 마님은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고, 아아아아, 지는 아직도 도둑놈인데…….“
빈소에서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이기채와 이헌의는 눈시울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필자소개] 
전라북도 정읍 태인생, 순천시 거주
순천문인협회, 팔마문학회 정회원,
전남교육청 학교폭력방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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