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26] 경운궁(慶運宮)의 국제정치
[유주열의 동북아物語-26] 경운궁(慶運宮)의 국제정치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 승인 2018.08.0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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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재청에서 덕수궁 선원전 등 일부 전각의 복원 계획을 발표하여 덕수궁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임진왜란으로 황급히 서울 떠난 선조가 1년 후 환도하여 임시 거주한 ‘정릉동 행궁’이 경운궁이었다. 정릉동은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사랑하던 신덕왕후 강(康)씨의 무덤을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위에 만들어 놓고 정릉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영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강씨는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로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도 강씨의 지략은 당하지 못했다. 강씨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왕자의 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 초기의 역사는 완전히 달랐을 것으로 본다. 강씨가 한창 나이인 40세에 죽음으로써 이성계는 유능한 정치 참모를 잃고 멘붕 상태에 빠진다. 

이성계는 정릉 남쪽에 흥천사를 건립하여 강씨의 명복을 빈다.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이방원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정릉을 한양 도성 밖(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키고 흥천사를 폐찰(廢刹)시킨다. 외국 대사관이 밀집된 중구 정동은 정릉에서 유래된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세조는 흥천사가 있던 곳에 혼자 된 며느리 수빈 한씨를 위해 사저(私邸)를 마련해 주었다. 사저라고 하지만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수빈 한씨는 20세에 요절한 세조의 큰 아들 도원군(의경세자)의 부인으로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의 어머니였다. 한씨는 결혼 5년 후 세조가 왕이 되면서 세자빈이 되어 입궐하였다가 2년 후에는 남편을 잃고 퇴궐해야 했다.

수빈 한씨가 정릉동 사저에서 1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한명회의 딸과 결혼 시켰다. 한명회는 과거에 급제를 못해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딸들을 왕가에 결혼시켜 세도를 부렸다. 그는 말년에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동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놓고 자신의 호(號)를 압구정이라 짓고 노후를 즐겼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병이 위중해 둘째 아들 예종에게 양위한 후 다음 날 승하한다. 그러나 예종도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다음 왕위는 의경세자의 두 아들 중에 장남인 월산대군에게 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둘째 자을산군을 왕이 되도록 한다. 그가 성종이다. 동생은 왕이 되고 어머니가 인수대비가 되어 입궐하자 월산대군은 정릉동 집을 지키면서 산다. 월산대군이 죽은 후 100여년이 지나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하였다. 다행히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의병의 분전으로 1593년 1월 서울을 수복, 선조는 그해 11월 환도한다. 서울의 궁궐은 모두 불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선조는 궁궐이 재건될 때까지 과거 월산대군이 살던 집에 거주하니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다. 선조는 이곳에서 임진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을 치루는 등 15년간 살다가 승하하였다. 세자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3년 간 지내다가 전화로 소실된 주요 전각이 복구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다. 광해군은 왜군을 물리친 경사와 국운을 기려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정식 궁호(宮號)를 부여한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역모사건을 빌미로 계모 인목대비를 폐하고 경운궁 석어당(昔御堂)에 유폐시킨다. 1623년 이귀 최명길 등이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내세워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경운궁의 즉조당(卽祚堂)에서 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위 8일 만에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을 월산대군 후손에게 돌려준다. 경운궁은 다시 한적한 별궁으로 남는다.

사진출처:공공누리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의 세력다툼으로 조선 왕조는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기울어 가는 조선을 외세의 힘을 이용 다시 세우려는 일념이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강국의 하나인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권자 명성황후의 친러 정책이 일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1895년 10월 일본군이 낭인으로 변장 경복궁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 한 것이다. 친일 대신으로 가득 찬 경복궁에 갇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비밀리 거처를 옮긴다. 1년 후 고종이 다시 환궁을 해야 할 때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다. 
16세기 선조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릉동 행궁’에서 다진 왜군 격퇴와 재조(再造)의 각오처럼 고종도 경운궁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 위협 속에 미국 영국 러시아의 세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고종은 1897년 태극전으로 이름을 바꾼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언한다.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法宮)답게 2층 구조의 중화전을 짓고 중화전의 문인 중화문과 함께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을 세웠다. 고종은 영국의 설계사 J R 하딩을 시켜 석조전이라는 콜로니얼 스타일의 양식 전각을 건축케 하여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인다. 

1904년 4월 고종 황제의 침소인 함녕전에서 발화된 불은 경운궁의 많은 전각을 불태웠다. 화재 후 중화전은 단층으로 재건하고 금천교 앞의 인화문 대신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새로운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의 한(漢)은 운한(雲漢) 또는 소한(霄漢) 즉 하늘을 의미하여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연결 국조연창(國祚延昌 대한제국의 번창)의 염원을 담았다. 대한문은 하늘과 소통하는 천자(天子)가 사는 궁궐의 문이란 뜻이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1905)의 불법성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한다. 1907년 황제가 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남겨진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여 궁호를 덕수궁(德壽宮)으로 개명한다. 경운궁이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언한 국제정치의 중심이었다면 덕수궁은 은퇴한 황제의 여생을 보낸 조용한 별궁이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로 일본 총독부는 수많은 전각을 헐어내고 경운궁의 북문인 영성문(永成門)이 있는 선원전(璿源殿 역대 국왕의 제사를 지내는 궁궐 내 종묘)에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후에 경기여고 이전)와 덕수초등학교를 이전시키면서 덕수궁을 크게 축소시킨다. 선조가 경운궁에서 재조에 성공했듯이 고종도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새로운 경사를 기대하였으나 결국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불운궁(不運宮)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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