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구슬픈 가야금소리에 풍덩 젖다
[Essay Garden] 구슬픈 가야금소리에 풍덩 젖다
  • 최미자 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11.2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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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다. 집 근처에 어머님의 후배가 피아노 개인지도를 하고 있어 난 어머니를 졸라 바이엘 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30분씩 배웠는데 3개월 만에 습득해버렸다. 그 후론 중학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일주일에 한번 음악실 피아노로 강습을 받기도 했다. 또 부지런 하면 학교 강당 피아노를 아침에 공짜로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 선배가 새벽 5시에 와서 한 시간 치고 내가 6시에 와서 쳤다. 어머니는 나를 보호하느라고 따라나섰지만 내가 무리하는 것 같아 건강을 걱정하셨다. 얼마 후 어머니가 나의 학교 성적에도 지장이 있을 것 같다며 아침 연습을 그만두기를 권하셨다. 매우 섭섭했지만 나는 피아노 치기를 그만 두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아버지의 병환으로 좌절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나에게 작은 희망이 찾아왔다. 가야금 선생님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젊은 여선생님께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국악을 전국의 학교에 보급시킨다는 소식을 전하며 우리 학교에 배정된 것이다. 물론 무료 수업이었다. 방과 후에 약 십 여 명의 학생이 모여 신식 악보로 가야금 타는 법을 배웠다. 피아노를 배워둔 덕에 나는 빨리 터득하여 ‘천안 삼거리’ 등 우리민요를 신나게 탔다. 

아, 그 매력적인 소리, 내 가슴을 울렸던 비단실을 꼬아 만든 12줄에서 나오는 신기한 가락들. 선생님도 내가 가야금을 잘 튕기니 칭찬을 했다. 한번은 문화재위원인 나의 오빠를 혹시 부부로 꿈꾸며 여선생님께 소개했다. 고대건축가와 가야금을 치는 멋진 어울림 같아서였다. 여고 2학년 때는 경주를 거쳐 진주의 촉석루를 방문하는 수학여행 때 가야금 선생님은 나를 잠시 선생님 부모님께 데리고 갔다. 부친은 진주 어느 시장 안에서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야금 선생님은 당시 나의 친정어머니가 우리 모교 동창 회장이었으니 나에게 집안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합창 반에서 활동 중이었지만, 가야금을 배우는 시간은 말할 수 없이 즐거운 탈출구였다. 당시 집안 걱정으로 공부가 잘 되지 않았기에 우리나라 고유악기 가야금 소리는 더욱 내 아픔처럼 들렸다. 그 후론 나도 졸업을 했고 선생님도 우리학교를 떠나셨다. 무심한 세월 속에 살다보니 나는 송정희 선생님의 그리움만을 품은 채 여태 살아왔다. 

지난날 내가 대학을 대구에서 다닐 때도 나는 가정교사를 하여 돈을 모아 가야금을 샀다. 동성로의 어느 2층 작은 방에서 개인지도도 받았다. 할아버지가 악보도 없이 말로만 매일 조금씩 가르쳤다. 종종 나의 자취방에서 달밤에 불을 꺼놓고 민요를 튕기며 감상에 젖었던 시간들. 대학교 예술제에서 우리악기를 알리고 싶어 나는 진양조와 민요를 독주도 했다. 

결혼 후에도 나의 가야금 열정은 계속 되었다. 대전시내 어느 골목에 걸린 간판을 보고 찾아갔더니 그 할머니도 말로만 가르쳤다. 남편의 전근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때라 다음은 광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는 사동에 국악원이 있었다. 드디어 유명한 성금련 선생이 만든 음악책으로 그 제자들이 가르쳤다. 그렇게 신이난지도 얼마 안 되어 나는 또 평택사택으로 이사를 갔다. 주부로 살며 주위의 여건이 되지 않으니 가야금은 장식품으로 방 한쪽에 쓸쓸하게 서 있게 되었다. 이민 올 때도 내 가야금이 좋은 품질도 아니었고 크기가 길어 짐 속에 부칠 수가 없었다. 간혹 미디어로 가야금 소리를 들으면 지난날의 향수병에 걸린 나는 잠을 설치곤 했다. 

어느 날 미국의 교회에서 우연히 일본 사람이 가야금을 변형해서 만든 ‘고토’라는 것을 연주 하는 걸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우리 악기인 장구도 그들은 개발해 놓고 일본의 아름다운 문화를 미국 곳곳에 수 십 년 전부터 알리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나라 국민과 정부는 아직도 그 점에서 매우 인색하다. 껍데기만 부강한 나라와 개인으로 보여 진다. 

세계 속에 발을 맞출 수 있는 지도자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청빈한 사육신 같은 분들이 그리워진다. 가야금의 비단 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한국역사 속의 못난 정치인들이 중국의 침략 속에서도 당파 싸움이나 하던 서러운 아픔 같아 우울해진다. 제발 이제는 배운 만큼 높은 수준의 국가가 되어 주시옵기를 해외에서 나는 간절히 빌고 빈다.

필자소개
경북 사범대 화학과 졸업
미국 샌디에고 30년 거주 수필가
저서 세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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