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촌만필] 갑을관계
[선비촌만필] 갑을관계
  •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 승인 2019.02.18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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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가 사회적 강자와 약자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소위 ‘갑질’이라 하여 사회적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규탄하는 비속어로 자리 잡고 있는데 최근 몇 가지 악성 갑질 사례가 국민적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원래 계약의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였는데 요즈음에는 비대칭적인 권력의 상하관계라는 의미로도 쓰이며 이는 힘의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한국적 갑을관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과 사회 상태의 인간은 구별된다고 했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 환경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 조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불평등,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갑을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힘의 우열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지배와 복종의 권력질서가 생겼다는 것이다.

봉건 시대에 제도화된 불평등 관계 즉 주종(主從)관계나 신분상의 귀천(貴賤)관계, 계급질서상의 상하관계는 명령과 복종, 지배와 추종이라는 특권, 신분 질서였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갑을관계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사에서 권력, 재력, 성별, 신분, 재능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 관계는 수천 년 지속되어 왔다. 갑을문화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 온 키워드였다.

이런 인류의 숙명적인 불평등(不平等)관계를 근대이후 어떻게 순화, 개선시켜 왔을까? 18세기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인간의 천부적 인권과 자유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적자치(私的自治)의 원칙과 계약자유(契約自由)의 원칙은 그 시대의 지고(至高)한 가치였다. 당시 혁명사상은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능력도 평등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자유시민이나 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공정한 질서가 자리 잡는 이상(理想)사회였다면 오늘날 우리가 언급하는 불평등을 상징하는 갑을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능력이나 조건, 기회가 평등하기는커녕 그 편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수차례 혁명을 겪은 현대 문명사회에서 제도적 불평등은 해소됐다고는 하나 자유 평등사상이 보편화된 삶의 현장에서 개인이나 집단 간의 불평등과 불공정한 현실이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경쟁시장에서 승자독식 문화와 심화된 양극화 현상도 갑을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 ‘을’이 다른 경우 ‘갑’이 되는 현상도 있고 ‘병’의 입장에서 보면 ‘을’도 ‘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을질’로 지칭되는 갑을간의 힘의 반전현상도 목도되고 있다. ‘을질’은 을이 갑의 치명적 약점을 공개하며 갑을 궁지로 몰아넣는 갈등관계를 풍자한 것이다. 이런 ‘을의 반란’이라는 현상도 공정사회를 지향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경제민주화 바람과 함께 디지털 기기와 SNS를 통해 그사이 감쳐져 있던 갑들의 ‘갑질’을 언제 어디에서나 현장을 녹화, 녹취하여 그 적나라함을 사회에 고발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었기에 그들의 호소가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소프트 파워가 하드파워를 이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스마트 기기를 통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사람과 현장이 연결된 세상임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 자유롭고 공정하며 평등한 사회에서도 엄존하는 불평등과 힘의 불균형을 어떻게 조정하고 개선해야 할 것인지는 사회정책의 문제일 것이다.

소위 ‘을사(乙死)조약’이라고 자학하는 불평등 계약을 통해 군림하며 이익을 독점하는 갑을관계가 아닌 공정을 기반으로 이익을 공유하고 상생하는 갑을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쟁은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없기에 사회적 갈등관계를 종식시킬 수도 없다.

오늘날의 집단, 개인관계는 모두 계약관계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계약’이라는 형식의 약속으로 집단적, 개인적 권리의무 관계가 발생한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계약 부자유의 원칙’이 되어버렸다는 ‘을’들의 이유 있는 항변에는 귀 기울여야 한다.

이런 계약사회에서 발생하는 갑을관계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으로 공정하고 건강한 갑을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승복할 수 없는 갑을관계를 청산하지 아니하면 갑, 을 모두가 공멸하고 나아가 우리 공동체를 파멸 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공존공영의 가치를 구현해 존경받는 갑들의 출현을 상상하며 성숙된 사회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어 수많은 ‘을’이나 ‘병’들도 품격 있고 근사한 ‘갑’의 꿈을 키우며 성취해 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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