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33] 러시아의 항일유적을 찾아서
[유주열의 동북아物語-33] 러시아의 항일유적을 찾아서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2.2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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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이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폭압이 심해지자 많은 독립투사들이 고향을 등지고 내만주(중국의 동북3성)와 외만주(러시아의 연해주)로 넘어가 그곳의 독립투사들과 합류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중국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많이 알려지고 또한 역사의 현장이 잘 보존 관리되어 학생들의 탐방활동도 활발하다. 러시아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조명을 늦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비슷한 시기에 수교하였지만 중국은 적극적인 개혁 개방으로 수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진출이 활발했지만 러시아의 연해주는 비교적 군사상 민감한 지역으로 러시아 정부가 개방을 늦춘 이유도 있었다.

지난 2년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그리고 이르쿠츠크를 여행을 하면서 러시아에 남겨진 항일 유적지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으로 조금 떨어진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1860-1920)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가 살던 집이 아직 남아 있어 한 세기 전의 역사였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최재형은 사재를 털어 조국의 독립운동에 지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류인석 등 중국에서 활동한 많은 독립투사들이 연해주를 방문 최재형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성공한 것도 최재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살에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도 최재형이 아끼던 총이었다고 한다.

최재형의 아버지는 노비였고 어머니는 기생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천민출신이었다. 아버지 최흥백은 고향 회령을 떠나 1869년 연해주의 지신허(鷄心河)에 이주했다. 지신허는 청나라 영토였으나 1860년 러시아와 청국과의 베이징조약에 의해 러시아 땅이 된 곳이다. 베이징 조약은 제 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청나라가 러시아 영국 등과 체결한 것으로 조약에 의거 청국이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영국에게는 홍콩의 주롱(九龍)을 할양했다.

청국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면서 청국의 발상지 만주지역을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한족 등 이민족의 접근을 불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들은 두만강을 건너 월경을 해왔다. 1860년 이후 러시아령이 되면서부터 까다로웠던 청국의 관리가 물러나자 우리 민족의 본격적 이주가 시작됐다.

아버지 따라 온 10살의 최재형은 배고픔으로 가출하여 지신허에서 멀지 않은 포시에트 항의 거리를 헤매다가 쓸어졌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러시아인 선장 부부에게 구출되어 부인으로부터는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배우고 선장은 아시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데리고 다니면서 견문을 익히도록 했다.

성인이 된 최재형은 군수업에 뛰어 들었다. 마침 중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8개국 연합군이 파병을 하게 되자 러시아는 대군을 연해주에 대기시켰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군수물자의 납품으로 거액의 부(富)를 쌓아 이를 기반으로 연해주 거주 동포들을 도우고 항일 투쟁에는 아낌없이 사용했다. 동포들은 최재형을 “페치카 최“로 불렀다. 추운 겨울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페치카가 바로 최재형 이었다.

아무르 강이 흐르는 하바롭스크에서는 김애림(알렉산드라 김)의 이야기를 들었다. 1869년 아버지 김두서(표트르 김)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김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하고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다. 러시아가 동청철도(東淸鐵路 Chinese Eastern Railway) 건설시 중국어 통역원으로 활동했다.

동청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 북만주를 직선으로 종단하여 치타까지 연결하는 철도이다. 러시아는 아무르 강을 따라 놓아야하는 시베리아 철도 구간의 난공사로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별도의 동청철도가 필요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에게 할양됐던 요동반도를 반환케 한 대가로 러시아는 청국의 리홍장과 밀약하여 1896년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어 낸 것이다.

1902년 김애림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철도 기술자로 건설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아버지의 친구 폴란드계의 러시아인 스탄케비치의 가족이 된다. 스탄케비치는 김애림이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교사의 자격증을 획득한 김애림은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 와 한인들을 도왔다.

남편과 이혼한 김애림은 1915년 우랄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우랄의 산림 개발회사에 고용된 중국인과 조선인 벌목공 통역이었다. 1917년 초 김애림은 우랄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독립을 위해 볼셰비키에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볼셰비키에서 볼 때 김애림은 하늘이 준 인재(Godsent Gift) 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으로 모국어인 조선어는 물론 러시아 중국어 등 주요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1917년 레닌은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해 극동 하바롭스크에 파견했다. 한인을 규합 조직하는 일이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집권하자 김애림은 볼셰비키 극동 외무위원장(commissar for foreign relations)으로 발탁됐다. 하바롭스크는 모스크바에서 멀어 떨어져 현지에서 중요한 외교적 결정을 해야 경우가 많다. “철의 여인(Iron Lady)”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호하면서 현지 문화와 언어에 능숙한 김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가 적임이었다.

1918년 8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러시아 백군에 의해 하바롭스크가 포위됐다. 김애림은 동료들과 아무르 강 증기선을 타고 탈출하였으나 러시아 백군에 의해 나포됐다. 김애림은 1918년 9월16일 새벽 처형되고 아무르 강에 수장됐다. 김애림이 처형되기 전 조선 8도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지막 여덟 보를 또박 또박 걸었다. 그 후 하바롭스크를 탈환한 볼셰비키는 그녀를 추모하여 아무르 강의 물고기를 수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2009년 김애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독일제국과 단독 강화하여 전선에서 이탈하자 영국 프랑스는 당황했다. 영국은 체코 폴란드와 함께 동맹국인 일본의 파병을 요청했다.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일본은 73,000여명의 대군을 출병시켰다. 일본은 러일전쟁 후 획득하지 못했던 이권 확보의 목적도 있었지만 일본 천황제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의 아시아 파급을 사전에 막아야했다.

일본은 연합군과의 약속을 깨고 연해주는 물론 바이칼 호를 넘어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 중심으로 진격했다. 일본은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독립지사들은 이르쿠츠크 레닌가 23번지 건물에 모여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의 움직임을 염탐하고 항일투쟁의 모의를 했다고 한다.

러시아 백군은 1918년 해군제독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수반으로 한 반(反)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했다. 1920년 2월 콜차크는 황당하게도 우군인 체코 군단에 의해 포획 처형됐다. 그는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강에 수장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르쿠츠크에는 앙가라 강을 바라보고 있는 콜차크 제독의 동상이 서있다.

일본은 콜차크 정부가 붕괴되자 영토욕을 의심한 연합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시베리아 철병을 결정하고 연해주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1920년 4월 한인들을 무차별 공격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최재형도 4월 7일 우수리스크 자택에서 붙잡혀 처형됐다. 1962년 한국정부는 최재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러시아의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적군 및 백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항일 투사들의 발자취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가 잊혀지기 전에 관계국과 협력하여 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그 유적지를 잘 보존 관리해야 한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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