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추억의 오솔길
[이영승의 붓을 따라] 추억의 오솔길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9.03.0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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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초였다. 회사의 ‘지방순환근무제도’에 의해 대구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나는 고참 부장으로 그해 승진하지 못하면 다시 기회가 오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이었다. 혼자 사택에 살다보니 부서 내 간부직원들이 가끔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하루는 단골로 다니는 한정식 집 주인마담이 내가 외로워 보인다며 애인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아끼는 여고 후배인데 미스코리아 대구지역예선 8강까지 오른 미모의 이혼녀다. 나이는 마흔셋이며 현재 꽃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은 화훼협회 총무를 맡아 열심히 활동하는 것 같더라”고 했다. 미모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나도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했다. 조만간 식사자리에 한번 초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어떤 사람일까?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내 생애에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이성을 기다려본 적이 있었던가? 고심 끝에 애틋하고 진정성이 담긴 자작시 한수를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용기와 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

약속한 그날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훤칠한 외모와 세련된 의상에 완전 압도되었다.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나와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동석자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띄웠다. 차츰 어색한 분위기가 해소되기 시작했다. 준비한 시를 꺼내 낭송 후 두 손으로 정중히 바쳤다. 그녀도 내게 호감을 보이는 듯했다. 시 낭송에 찡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다음번 만났을 때 그녀로부터 들었다.

몇 번 만나고 난 뒤 하루는 작심하고 말했다. “당신 같이 미모를 갖춘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이도 많고 가진 것도 없는 나 같은 월급쟁이에게 정을 주느냐?” 

긴 한숨 끝에 그녀가 차분히 대답했다. “20대 초반에 미스경진대회에 출전하고, 웨딩숍 운영으로 경제적 자립까지 이루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다. 36세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풍모에 반해 신분이나 인간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결혼을 하였다. 얼마간 살다보니 술과 도박을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류하는 나를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숱한 고생 다 겪었다. 결국 위자료 한 푼 없이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헤어졌다.”

호흡을 잠시 조절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잘난 남자는 솔직히 관심 없다. 진실 되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 좋다. 왠지 모르게 첫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이 끌리더라. 그러나 나를 가엾게 여기지는 마라”고 했다.

그동안 그녀 앞에만 서면 마음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그 날 이 후부터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의 만남은 급진전되었다. 시간만 나면 경주 등 유적지를 찾아다녔으며, 때로는 멀리 동해안까지 드라이브도 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손을 꼭 잡고 무한정 해변을 걷기도 했다. 야외로 드라이브할 때는 항상 그녀가 운전을 했다. 운전이 취미라고 했지만 실은 나의 과속을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음식은 언제나 저렴한 것으로 주문했으며 무엇이나 맛있게 잘 먹었다. 소탈한 그 모습이 나에게는 천사같이 느껴졌다.

당시 그녀의 딸아이는 6살 이었는데 누구에게 맡길 수 없을 때는 가끔 데리고 나왔다. 엄마를 닮은 아이는 정말 예뻤으며 영악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날 내가 눈치 없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을 아이가 보았다. 그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자기 엄마를 빼앗아 갈 나쁜 사람으로 의심하는 것 같았다. 아이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예쁜 옷과 장난감을 사주는 등 온갖 공을 드려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제 아이 앞에서 엄마의 손을 잡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었다. 아이 눈치 때문에 시선조차 마주 할 수 없었다. 참다못해 하루는 “앞으로 만날 때는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꿈같은 5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우리의 로맨스를 아내가 눈치 채고 말았다. 퇴근 후 전화를 자주하지 않고, 주말 귀경 횟수도 줄어들자 나를 의심했던 것이다. 나 몰래 아내가 사택 경비실에 전화해 퇴근 여부를 체크했으며, 이를 확인하러 대구에 다녀가기도 했다. 하루는 모처럼 귀경한 나를 불러 앉히더니 모든 정황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변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정면 돌파를 결심했다. 

“여자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이 의심하는 불륜은 아니다. 우리 회사와 화환을 거래하는 꽃집 사장인데 고객 관계로 몇 번 만나 식사했다. 사업상 내 도움이 필요해 그 사람이 대접한 것이다. 10살이나 나이 많은 나와 무슨 연애를 하겠는가? 믿지 못하면 함께 만날 수도 있다. 얼마 후 대구 화훼협회의 꽃 전시회가 있는데 고객 안내를 맡았다고 하더라. 관람하러 간척하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내 말을 완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그 다음 일은 그녀와 말을 맞추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내가 나 몰래 꽃 전시회에 다녀왔다. 고객인양 가장하여 그녀와 말도 나눠보고, 한복 입은 화려한 모습을 몰래 카메라에 담아 왔다. 그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시시한 사람을 만날 것 같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 그 정도면 마음이 홀릴 만도 하더라. 회사와 가정밖에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때 연애 한번 못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이왕 할 바엔 돈도 쓰면서 멋있게 만나라. 당신은 지금 꿈같은 오솔길을 걷고 있다. 대로와 계속 평행한 오솔길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오솔길이 짧기만을 기다리겠다. 다만 올해는 꼭 승진을 해야 하니 오솔길이 끝나는 순간에는 미련 없이 대로로 나오겠다는 약속을 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내가 돌부처를 데리고 살았나 싶기도 했다. 진심으로 “하늘을 두고 맹세 하겠다.”고 언약했다. 다만 자식들에게만은 절대 비밀로 하자고 했다. 아내도 동의를 했다. 

얼마 후 아내가 아이들 남매를 데리고 대구에 내려왔다. 명분은 경주 관광이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긴장되었다. 식사 도중에 아이들이 나를 보며 킥킥 거리고 웃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아들 녀석 왈 “아빠, 요즘 연애하신다면서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아내를 쳐다보았다. “너희 아빠 요즘 이렇게 멋있게 산다고 내가 다 얘기했어요. 뭐가 잘못됐나요?”라고 했다. 어쩔 수 없어 한바탕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분명 ‘자식들까지 다 알고 있으니 처신에 각별 조심하라’는 아내의 계산된 포석임이 틀림없었다. 

급기야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순간적인 나의 방심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당신은 예쁜 여자를 그토록 애틋하게 좋아하면서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는 가엾은 남자 같아요?”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슨 소리야? 나도 성인군자가 아닌 보통 남자야”라고 말해버렸다. 앗 차! 하는 순간 아내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 눈빛이 무서웠다. 당장 이혼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렇게 화난 모습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무엇보다 자식들까지 알고 있음이 두려웠다. 이 난관을 어찌하랴?

정신을 가다듬어 “그럼 왜 처음 알았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느냐?”고 겨우 한마디 했다. “그때는 분명 불륜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당신의 순수함을 믿었어요. 그리고 그 때 당신 눈에는 온통 그 여자밖에 없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정면으로 막아서면 당장 가정이 파탄날 것만 같았어요. 그동안 내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알기나 해요?”라고 하는데 그 표정이 실로 처절했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당장 끝내겠다는 결연한 언약을 하고서야 위기를 모면했다.

며칠 후 그녀를 만났다. 아내가 모든 것을 알게 된 경위를 상세하게 얘기한 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침울하게 고개를 들더니 “알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냉정히 돌아서 나가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 후 몇 번 용기를 내어 전화했으나 아예 받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향으로 봐서 ‘자기 관리도 못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작심했거나 ‘남의 가정 파탄 내면서까지 만나기는 싫다’는 결연한 의지 같았다. 바보 같은 나의 순진함을 수없이 자책했다. 그녀를 웬만큼 잊기까지는 일 년이 넘게 걸렸다. 조항조의 ‘사나이 눈물’을 수없이 불렀다. 나를 위해 작곡한 노래 같았다. 지금도 나의 18곡이다. 그해 말 나는 승진을 했다. 더 오래도록 정신 차리지 못했다면 아마도 승진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해와 용서로 위기를 넘기게 해준 아내가 고마웠다. 

15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흘렀다.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몰라주던 그 아이는 지금쯤 얼마나 자랐으며, 두 모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 시절 잠시 거닐었던 아련한 추억의 오솔길!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세월 속에 아득히 멀어져간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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