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35] 니에얼(聶耳)과 정율성
[유주열의 동북아談說-35] 니에얼(聶耳)과 정율성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01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애창됐던 노래가 1930년대 ‘의용군 행진곡’과 ‘팔로군 행진곡’이었다. 팔로군(八路軍)은 중국 국민혁명군 예하의 공산당 부대였다. “의용군 행진곡”은 중국인이 가장 선호한 곡으로 1949년 제1차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 국가(國歌)로 지정됐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결성되기 5년 전이었다. ‘팔로군 행진곡’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 군가가 됐다. 

‘의용군 행진곡’은 항일 의용군을 위해 작곡된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영화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영화가 워낙 유명해지면서 영화 주제가가 국가로 승격되는 특이한 경우였다. 

일본은 1931년 9월18일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3성을 유린하고 다음 해인 1932년 1월28일 다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남중국을 위협했다. 당시 상하이는 양쯔강(長江) 대홍수의 피해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3개월 후인 4월 29일은 소와(昭和) 일왕의 탄생일(천장절)이었다. 일본은 상하이 사변 승리 축하 겸 천장절 기념행사를 상하이의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개최했다. 행사에는 중국주재 공사(지금의 대사)와 상하이 사변의 주역 장성들이 단상에 참석하고 상하이 일본 거류민이 대거 동원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 선생의 지휘 하에 윤봉길 의사가 삼엄한 경계를 뚫고 식장으로 들어가 준비한 물통 폭탄을 단상을 향하여 투척했다.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장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공사 등 일본 장성과 정부 요인을 죽게 하거나 중상을 입혔다.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는 윤 의사의 쾌거를 백만 중국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고 평가 할 정도로 중국 인민들이 열광했다. 

장제스는 “일본군은 피부병에 불과하지만 공산당은 심장병”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장병을 잡는다고 백색테러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체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공산당원은 농촌으로 숨어들었고 중국의 허리우드라는 상하이에서는 많은 좌익 예술인들은 연극과 영화로 항일 운동을 이어 나갔다. 

1935년에 개봉된 영화 ‘풍운아녀(風雲兒女)’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당대의 최고 여배우 왕런메이(王人美)가 주연한 풍운아녀는 항일전선에 뛰어든 어린 학생들을 소재로 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주제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가사를 지은 텐한(田漢)은 국민당에 체포돼 난징의 헌병대에 수감돼 있었다. 

“치라이(起來)! 치라이(起來)!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자“

‘의용군 행진곡’은 텐한이 감옥에서 담배갑 은종이에 시를 써서 작곡가 니에얼(聶耳 1912-1935)에게 몰래 전달하여 곡을 붙이게 된 것이다. 윈난성(雲南省) 쿤밍 출신의 니에얼은 이름대로 청각이 예민한 천재 작곡가였다. 니에얼은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왕런메이를 좋아했으나 왕런메이는 한국 출신의 영화배우 김염과 결혼했다. 

김염은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의 처조카로 김규식 박사가 텐진의 베이양대학(현 텐진대학)에 영문학 교수로 있을 때 난카이 중학을 다녔다. 영화를 좋아 한 김염은 상하이의 영화계에 뛰어 들어 크게 성공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무성영화 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를 닮았다하여 ‘상하이의 발렌티노’라는 별명까지 얻은 김염은 상하이 영화계의 황제(映帝)로 군림했다. 

실연한 니에얼은 국민당의 체포를 피하여 소련으로 음악유학을 가기 위해 요코하마행 배를 탔다. 일본에 도착한 니에얼은 지인이 있는 도쿄에 머물면서 무더위를 피해 멀지 않은 후지사와(藤澤)시의 쇼난 해안에서 수영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다음 날 그의 익사체가 발견됐다. 1935년 7월17일 니에얼 나이 23세의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 와 쿤밍 서산에 안장됐다. 쇼난 해안에는 니에얼 기념비가 있고 니에얼로 인해 쿤밍시와 후지사와시는 자매도시가 됐다.

얼마 전에 쇼난 해안이 있는 후지사와시를 다녀왔다. 80여 년 전 니에얼을 삼킨 푸른 바다는 아무 일 없는 듯 잔잔했다. 쇼난(湘南)은 일본 선종(禪宗)의 출발지로 알려진 중국 후난성(湖南省) 상장(湘江)의 남쪽 지역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의 마이매미라는 별명이 붙은 쇼난의 롱비치는 푸른 파도와 깨끗한 모래 그리고 송림으로 유명하고 인근의 오이소(大磯)에는 귀족들의 별장이 몰려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도 오이소에 있었다.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14일 하얼빈으로 가기위해 오이소를 출발했으나 안중근 의사에 저격돼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결혼한 일본의 왕족 마사코(李方子)는 1916년 여름 어느 날 오이소의 아버지 별장에 배달된 조간신문에 조선의 황태자와의 정혼이 보도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여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인민해방군 군가가 된 “팔로군 행진곡”은 한국인 정율성(鄭律成 1918-1976)이 작곡한 것이다. 한국의 광주에 가면 그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 정율성로(路)로 바뀌었다. 동상이 있는 그의 기념관에는 버튼만 누르면 “팔로군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가사는 중국의 대표적 시인 궁무(公木)의 시였다.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
우리들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싣고서“

정율성은 191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 누나와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정율성은 조선혁명 간부학교에 다니면서 의열단에도 가입하는 등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우연히 소련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나온 여성 작곡가 크릴노바를 만나면서 운명이 달라진다. 그는 천부적 재능으로 성악과 작곡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가가 됐다. 이름도 부은(富恩)에서 율성(律成)으로 바꾸면서 선율(旋律)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시작되고 그해 10월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지휘부가 있는 연안으로 간다. 그는 혁명 도시인 연안의 풍경에 도취하여 다음해 4월 시인 모예(莫耶)가 작사한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했다. 연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이라 할 정도로 중국전역에 애창돼 많은 젊은이들을 연안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39년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다시 ‘팔로군 행진곡’을 발표했다. 

정율성은 일본이 항복하자 북한에 가서 조선인민군행진곡 등 많은 군가를 작곡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부인 딩쉐송(丁雪松 1918-2011)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온 정율성은 1976년 부인과 외동딸(鄭小提)을 남겨두고 58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혁명열사능인 베이징의 빠바오산(八寶山)에 있다. 정율성은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을 계기로 중국의 100대 영웅의 한사람으로 지정됐다.

정율성은 한중 가교의 인물이 돼 그의 음악은 1992년 8월 한중 국교수립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연주됐다. 2014년 7월 방한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서울대학 강연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인물로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12월 방중 시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정율성을 언급했고 광주의 정율성로를 소개한 바 있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