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42] 조어도 vs. 어조도
[유주열의 동북아談說-42] 조어도 vs. 어조도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0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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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아베 일본정부는 기어이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국내에서 ’노 재팬‘ 바람과 함께 일본 것은 모두가 나쁘다는 반일감정에 휩싸이고 있다.

얼마 전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학교생활 속에 일제잔재를 없앤다면서 우리말 속에 일본인이 만든 말을 찾아 없애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수학여행’은 일제시대 민족정신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조선학생들을 일본에 견학시키던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중국의 한자를 전수한 사람은 백제 사람 왕인이다.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도공 등 기술자와 함께 학자들도 납치해 갔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간 강항은 일본 지식인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보급시켰다. 일본에서는 강항을 “제2의 왕인박사”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은 이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 메이지 유신이후 서양의 용어를 적절한 한자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국가’ ‘정부’ ‘대통령’ 등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한자어가 일본에서 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오늘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한자어의 70% 이상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학자들이 번역한 말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국이나 중국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들에 의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를 역수입해서 쓰고 있는 셈이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다만 발음이 약간씩 다르다. 영어 economy의 번역어인 ‘경제(經濟)’는 일본에서는 ‘게자이’ 중국에서는 ‘징지’라고 읽는다. 글자는 동일하나 발음이 다를 뿐이다.

일본에서 근무할 때 고서점을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고서점에는 출판된 지 오래되어 시중에는 이미 사라진 책들이 많았다. 어느 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학자들이 한자어 번역에 고심했다는 기록이 담긴 책자를 발견했다.

그 책에 의하면 은행(銀行)이란 번역어가 정착된 경위가 나와 있다. 동양권에서는 없는 서양의 은행(bank)제도를 번역할 때 근대 은행제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은본위제였던 당시 돈(銀)을 사고파는 비즈니스(行)라는 의미로 ‘은행’이라는 번역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은행이 아니고 은고(銀庫)라고 불렀다고 한다. 은고는 돈을 저장(stock)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제도는 돈을 저장만하는 것은 아니고 돈의 흐름(flow)도 만들기 때문에 고(庫)보다 행(行)이 더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차츰 ‘은고’를 버리고 돈을 거래(매매)하는 기관 즉 ‘은행’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그대로 쓰다 보니 엉뚱한 일이 생긴다. 일본인들이 ‘도이치’ ‘로망’ 등의 발음이 나는 한자를 찾아 독일(獨逸)이나 낭만(浪漫)으로 음역해 표기했다. 한자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므로 일본인들은 ‘도이치’ ‘로망’으로 발음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일본에서 표기한 한자의 본래 발음(일본식 발음)이 아닌 우리식 발음으로 “독일” “낭만”으로 발음하면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가 쓰는 일부 한자어는 중국에서 만든 것도 많다. 중국 명나라 말기 마테오 리치 등 이탈리아 선교사가 들어와서 세계 최초의 수학교과서라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라틴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때 ‘기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기하(幾何)는 라틴어의 ‘geometria(토지측정)'를 번역한 것이다.

구라파(歐羅巴)도 ‘유럽’을 음역해 만든 한자어로 글자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없다. 구라파를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오우로파‘가 된다. 1602년 명나라 학자와 함께 마테오 리치가 작성한 중국어판 세계지도(坤輿萬國全圖)에는 아세아(亞細亞) 적도(赤道) 등도 보인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지식인들도 중국에서 만든 서양 개념의 한자어를 많이 가져다 썼다고 한다.

현재 우리 말 속에 들어 온 한자어는 일제(日製)가 대부분이나 중국제도 있어 어느 쪽인지 알고 싶을 때는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의 어순은 정반대다. 중국어는 기본 문형이 영어와 같이 동사+목적어로 되어 있고 일본어는 우리말처럼 목적어+동사로 되어 있다. 금융(金融)은 돈을 융통한다는 것으로 목적어가 먼저 나와 일제이고 융자(融資)는 동사가 먼저 나와 중국제로 보인다.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지만 중일간의 영유권 문제가 있는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를 중국에서는 다오위다오(釣魚島)라고 부른다. ‘고기를 잡는 섬’이라는 의미로 동사가 먼저 나와 있다. 센카쿠(尖閣)열도는 19세기 후반 영국 해군이 명명한 피너클(pinnacle) 아일랜드의 번역어이지만 일본의 고지도를 보면 오우쓰리시마(魚釣島)로 적혀있다. 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동사가 뒤에 배치(魚釣)되어 있어 중국의 표기(釣魚)와 상반된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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