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신의 진화'를 가로막는 것
일본 '정신의 진화'를 가로막는 것
  • 김정남 <언론인>
  • 승인 2011.05.1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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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극복 과정서 국수주의 강화 우려

김정남<언론인, 본지고문>

 
고난은 인류정신을 진화시키는가. 지난 3월, 일본의 도호쿠간토 대진재(東北關東大震災)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천재지변이었다. 일본 국민총생산의 10%가 손실되었고, 3만여명의 사망·실종자와 15여만명에 이르는 이재민을 냈다. 이 천재지변의 한 가운데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침착한 시민의식은 세계인의 찬탄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집과 가족을 잃고도 그들은 소리 없이 흐느꼈고, 살아있는 가족을 극적으로 만나고도 소리내어 기뻐하지 않았다.

굶주림 속에서도 순서를 기다리는 절도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그 엄청난 재난과 참상을 보도하면서도 NHK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조용조용했다. NHK의 화면에는 시뻘건 불길이나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은 비쳐지지 않았다. 대신 수도, 전기, 가스, 교통, 병원정보와 주민대피에 필요한 것들은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내보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재난이 닥쳤더라면 우리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재난을 통하여 일본인들은 그들의 의연한 자제력과 높은 질서의식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절제된 시민의식을 보고 어떤 서구 언론은 "인류 정신의 진화"라고 썼다.

일본의 절제된 시민의식과 세계인의 우애

그토록 심각한 참화의 불행 앞에서 차라리 목 놓아 통곡하고 울부짖으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처신은 참으로 훌륭했다. 그러나 어디 일본인뿐이랴. 전 세계가 구호와 원조에 나섰다. 온 세계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측은지심이 저절로 발동되었고, 한 나라가 아프면 온 지구가 아프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일본과 영토분쟁을 하고 있는 나라와 그 국민들도 일본 돕기에 나섰다. 과연 천지는 불인(不仁)했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仁)했다. 이와 같은 세계인의 우애정신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불빛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는 특수한 관계인데다, 특히 1923년의 관동(關東) 대지진때의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한민족의 땅, 한반도에서 '일본 힘내라'라는 소리가 나오고, 온 국민이 일본 돕기에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때 붉은 악마들이 펼쳐들었던 "함께 가자, 프랑스 월드컵으로"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차원 높은 금도(襟度)를 세계와 역사 앞에 보여준 쾌거였다.

한류스타, 대학생, 일반시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대할머니와 독립운동단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및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신사 문제, 독도문제, 일본교과서 문제, 재일동포와 사할린 문제, 친일파 문제 등 한일과거사 청산의 최일선에 서있는 시민단체들까지 일본 돕기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방대한 분량의「친일 인명사전」을 펴 낸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한일 과거사 청산이 인간의 생명과 인권의 존엄성에 기인했기에, 이제 일본시민들을 위로하고, 적극 돕고자 하는 것"이라고 공동모금운동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들은 악을 선으로 돌려준다거나, 원한을 은혜로 갚는다는 따위의 아무런 생각이나 조건 없이 일본 돕기에 나선 것이다. 나는 일본인의 불행과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떨쳐 일어난 지구촌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우리나라 정신대 할머니, 독립운동단체 관계자들, 한일과거사 청산운동의 시민단체 사람들한테서 더 큰 '인류정신의 진화'를 보았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보여준 절제나 질서의식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인류정신의 진화'를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슬기롭고 의연하게 우리가 앞장서서

3년 전, 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수행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부터의 초청연설과 재일동포사회 순방을 위한 여정이었다. 그 때 YS는 와세다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한국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일본은 우리의 원수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내가 정치인이 되었을 때, 나는 일본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청과 일본을 미워하는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나는 3.1절 담화를 통하여 ‘정신대 할머니들의 생활은 우리가 책임지겠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정신대 문제의 진실을 밝히고 세계와 역사 앞에 겸허하게 사죄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결정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이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협력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나에게 잔명(殘命)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한국과 일본에게는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진보를 위하여 손잡고 해야 할 좋을 일, 기쁜 일, 지구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이 너무도 많다. 내가 죽을 때 한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일본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친구가 되어 손잡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문명을 함께 이끌어 나가라고 말하며 기쁘게 눈 감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YS의 연설은 일본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YS는 그것을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이 친구가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역사문제 정리라는 것을 충분히 암시적으로 전달했다.

이번 대진재의 와중에서도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담은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와 국민은 일본 돕기와 교과서 문제를 분리해서 슬기롭게 대응했다. 일본은 강하고 큰 나라로 이번의 재난을 딛고 일어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부흥에 국민의 역량을 집중시키는 방편으로 국수주의를 더욱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 동안의 국제사회의 지원을 고맙게 받아들여 국제사회와의 우호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않느냐는 전적으로 일본의 몫이다. 그러나 일본이 진정 '정신의 진화'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그 역사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소국(小國)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다. 일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의연히 우리의 정신적인 진화를 계속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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