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43] 에도(江戶)를 기억하자
[유주열의 동북아談說-43] 에도(江戶)를 기억하자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1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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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을 무역우대 대상국인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배제하는 등 한일관계가 1965년 국교수립 이후 최악으로 접어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일본과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한 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일본을 넘어서자는 극일 운동에 나서는 분위기다.

헤어질 수 없는 영원한 이웃국가 일본에 대한 ‘아름다운 복수’를 준비하는 극일의 첫걸음으로 일본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일본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한일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의 심장부에도(지금의 도쿄)의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치적인 잠재 라이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슨푸(駿府 지금의 시즈오카)를 내놓고 오다와라(小田原)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이에야스는 한술 더 떠 이름 없는 에도로 가겠다고 했다. 에도는 오다와라의 지성(支城)으로 100 km 더 동쪽에 있는 오지였다.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항우와 유방은 라이벌 관계였다. 세력은 항우가 우세했지만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진의 수도 함양을 먼저 진격한 유방은 덕치로서 민중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항우는 진나라 멸망에 공이 큰 유방을 오지의 한중(漢中)으로 보내 중앙으로 나오기 어렵도록 했다. 유방은 항우의 속내를 알고 한중으로 가면서 진령산맥의 잔도(棧道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를 모두 불태웠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시켜 항우를 안심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당시 에도(江戶)는 이름 그대로 여러 개의 강이 바다로 나오는 습지와 갯벌로 김을 키우거나 고기를 잡는 작은 어촌이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는 김을 키우는 대발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일왕이 거주하는 에도성은 바닷물이 넘실대는 해안가였다. 에도의 황량한 모습을 보고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부하들을 이에야스는 다독거렸다.

에도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연결되고 서쪽은 끝없는 억새밭이었다. 북쪽으로 지대가 약간 높아 그곳에 초가집이 몇 채 보이는 정도였다. 이에야스는 부하들로 하여금 칼과 창을 녹여 괭이를 만들어 바다를 메우고 집을 짓게 했다. 이에야스 부하들은 에도 개척의 이유로 2년 후의 임진왜란에서 열외 되고 1600년 히데요시 부하들과의 천하를 다투는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지금 도쿄 중심부의 절반 이상이 바다를 메운 곳이고 이곳에 인구가 집중해서 거주하다 보니 마실 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나와 마실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서쪽으로 다마가와(多摩川) 상류의 물을 수로를 통해 끌어와 집집마다 깨끗한 물(上水)을 마실 수 있게 했다.

북쪽의 도네가와(利根川)는 수량이 너무 많아 여름이면 에도 전체가 물에 잠기게 했다. 이에야스는 도네가와의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홍수를 예방하고 농사에 물을 댈 수 있는 거대한 평야를 만들었다. 식량 공급이 확보되자 에도가 대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오사카처럼 만들겠다고 장담하자 부하들은 고등어가 큰다고 고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에도는 목조 가옥이 많아 잦은 화재에 골머리를 앓았다. ‘화재는 에도의 꽃’라는 말처럼 에도인들은 화재를 일상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대형 화재를 막기 위해 불이 쉽게 번지지지 않도록 도로 폭을 키워 히로코지(廣小路)를 설치했다.

에도를 건설했으나 각 지역의 다이묘(大名 지방영주)들이 와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산킨코다이(參勤交代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영지와 에도를 왕래케 함)를 통해 다이묘들이 에도에 집을 지어 일정기간 거주케 했다.

에도의 주택 경기와 소비 경제가 활발해졌다. 지방의 다이묘들이 에도의 인질이 된다면 배신을 막아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도 일거양득이었다. 에도는 이미 18세기에 일본에서 가장 외진 어촌에서 당시 런던 파리를 능가하는 백만 이상의 세계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에도를 ‘동쪽의 교토(京都)’라는 의미의 도쿄(東京)로 명명하고 천도했다. 일왕은 교토의 궁성을 그대로 두고 과거 쇼군이 거주했던 에도성으로 궁을 옮겼다. 아카사카에는 새로운 서양 양식의 석조 건물을 지어 외국 지도자를 위한 영빈관으로 사용했다.

도쿄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유학생이 가장 많이 수학한 곳이다. 10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도 도쿄에서 나왔다. 도쿄는 항일의거의 중심이기도 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김지섭 지사는 1924년 일왕이 거주하는 고쿄(皇居)의 정문인 니주바시(二重橋)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던 이봉창 의사는 1932년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을 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폭탄을 던졌다. 수행 고관들이 부상을 입었으나, 일왕은 무사하여 거사는 실패했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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