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1809~1830)은 살아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서야 왕이 된 세자다. 조선조 후기의 임금 순조는 14살의 세자에게 조선의 향사(享祀)를 맡겼다. 본시 제향의 주관자는 마땅히 임금이어야 했지만,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맡긴 것이다. 더 나아가 순조는 건강을 핑계로 열여덟의 세자에게 대리청정까지 맡겼다. 효명세자는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며, 만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정책을 통하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은 제대로 그 실효를 보지 못했다. 그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쇠망은 그의 죽음으로부터 가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효명세자는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뒷날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시문(詩文)은 역대 임금의 시와 글을 모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편입되었다. 그가 남긴 많은 시문 가운데 그가 대리청정을 준비하던 1826년에 지은 일륙과공과기(日六課功過記)라는 글이 있는데, 매일 여섯 가지 일과(日課)의 잘잘못을 기록한 글이다. 매일 힘을 쏟아야 할 것 중의 하나로 과성(課省)을 들고,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밤에도 깨우침이 없었는지 스스로 반성한 것이다.
“밤에 누워 있을 때 홀연 대궐 바깥 가련한 민생이 떠오르고 한참 있다 보면 팔도의 창생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떠오르니 이는 하루의 한가지 공(功)이요, 독서를 오래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도 끝내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이것의 하루의 한가지 과(過)요, 독서를 오래 방치할 수 없음을 거듭 깨닫고도 책상 위에 책을 던져두고 끝내 읽지 않았으니 이 역시 하루의 한가지 과일지라. …”
효명세자는 1827년 중희당(重熙堂)에서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그해 겨울 일기를 만기일력(萬機日曆))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문예군주를 꿈꾼 그의 고심이 담겨있다. 군왕의 하루 업무를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하거니와 그의 성실한 일상이 드러나는 일기이다. 효명세자는 문예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 여러 편의 글을 남겼지만, 그의 ‘자경(自警)’이라는 글은 특히 눈길을 끈다.
“백성은 바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아, 임금이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하면 온 천리가 메아리처럼 응하고, 한가지 좋지 않은 생각을 해도 또한 그렇게 된다.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효명세자는 자신의 거처 이름을, 근본에 힘쓰는 집, 무본당(務本堂)‘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사람에게 시가 있는 것은 하늘에 꽃이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성정이 없을 수 없고, 성정이 펴지면 시가 없을 수 없다”는 시론을 남겼다. 1830년 느닷없이 피를 토한 끝에 5~6일 만에 죽으니 이때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다. 순조는 “곡을 하려고 하면 먼저 목이 메니 슬프고 슬프도다. …”는 내용의 제문을 썼다.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고종은 아비를 왕으로 추존한다. 효명세자의 ‘경세, 권위, 치인’ 정신을 기리는 특별전이 2019년 6월27일부터 9월22일까지 국립고궁미술관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