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3.1 ‘독립만세!’의 함성, 100년이 지나도 우렁차게 들린다!
[해외기고] 3.1 ‘독립만세!’의 함성, 100년이 지나도 우렁차게 들린다!
  • 오원성(재미칼럼니스트, 달라스한인회 이사장)
  • 승인 2019.11.0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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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희근 애국지사’가 목이 터져라 부르짓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렁차게 들려온다. 이토록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우리 가족에게 기적을 선물한 현 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말한다. ‘순국선열(殉國先烈)’은, 일본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옥고, 고문, 전사 등, 일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광복 이전에 숨진 독립유공자로, 그 공을 인정받아 훈장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이다. 애국지사(愛國志士)는, 일제에 항거하다 광복 이후에 숨지거나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정희근애국지사는 ‘하동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2명 중 한분으로, 우리 큰 며느리(신혜진)의 외증조할아버지시다.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른 분이 집안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목이 터져라 외치던 ‘독립만세!’의 함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이제 우리집안은 독립운동가로 합류하게 되어서인지, 몹시 떨리고 이보다 더한 기쁨과 감동은 없는 것 같다.

‘하동독립선언서’는 현 정부 출범이후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를 한명이라도 더 찾아내려는 노력 끝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2018년 4월, 경남 하동의 읍, 면사무소 문서창고에서 잠자던 것을 찾아내어 1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예우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분의 업적을 기리며 대통령께서 훈장과 함께 수여한 표창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고 정희근. 귀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9년 8월 15일. 대통령 문재인. 이름을 대통령표창부에 기재합니다. 행정안전부장관 진 영.

‘국가 보훈처 공훈록’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1919년 3월 20일 남해군 남해읍 장날에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다량 등사하는 등 시위준비를 한 후,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주도했다.’고.

이렇듯 정희근애국지사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인물로, 두 차례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녀이신 정순희여사(내게는 사부인)의 말에 의하면, 생전에 할머니께서 “네 할아버지는 의협심이 강한 분이었다. 만석꾼의 아들로 재산이 많았기에 8개월로 감형 받아 빨리 풀려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셨단다. 당시 3.1만세운동의 주동자임에도 후손들이 까마득히 모를 만큼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 앞에서 가족들이 알면 분명 만류했을 터였다. 또한 대부분의 옛 어른들이 그랬듯이 지극히 겸손하여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더라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도 감사를 드린다. 당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를 신고하라는 정책을 펼쳤기에,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사라질 뻔했던 ‘카이지마탄광 6, 7갱 조선인광부명부’룰 광운대학교 이향철교수가 발굴하면서, 그 속에 내 아버지의 ‘오정호’란 이름 석 자가 있었기에 ‘강제동원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국가관이 투철했던 아버지께서는 탄광에서 하루 15시간의 막노동으로 지친 몸에도, 저녁에는 한인들을 모아 놓고 일본의 동화정책에 맞서 싸우려면 우리말과 글을 익혀야 한다며 교육에 앞장섰고, 작지만 몇몇 분들이 독립자금을 모아 부산의 모처로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은 독립운동가의 흔적마저도 지우게 하는 등, 불행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마을 이장’을 자처하고 나서서 동네 사람들의 안전한 피난을 도왔다. 그러다 한밤중 들이닥친 인민군의 총구에 가슴을 찔리고, 끌려가다 탈출한 이후로 독립운동 당시의 자료들을 아궁이에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사연으로 진정한 애국자임에도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라를 지키려던 흔적은 어딘가에 존재하여 국가가 알아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다시 한 번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본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온몸으로 항거하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하여 최대한 예우를 하고, 후손들이 실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상 체계를 개편하는 일이야말로 국민통합의 첫걸음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고 떳떳한 삶을 살아가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고 본다.

만약 대한민국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날이 온다면, 나의 손자 승리(8세)와 혜성(5세)이는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설까?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외고조할아버지(독립운동가 정희근옹)와 증조할아버지(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오정호옹)께서 못내 궁금해 하실 것만 같다.

오원성(재미칼럼니스트, 달라스한인회 이사장)
오원성(재미칼럼니스트, 달라스한인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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