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아차산
[이영승의 붓을 따라] 아차산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20.01.29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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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峨嵯山)은 높이 287m로 서울시 광진구와 구리시에 접한 도시근교의 공원화된 산이다. 삼국시대 세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이던 역사 서린 산이기도 하다. 곳곳에 체육시설이 많고 등산로가 아기자기하여 주말이면 수많은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내가 이 산 밑의 광장동 극동아파트로 이사한 것은 올림픽 개최년도인 1988년이다. 이곳에 12여 년을 살면서 아차산에 오른 횟수는 줄잡아도 2백 번은 넘지 않을까 싶다. 남들이 아차산에 대해 아는 척하면 “아차산은 우리 집 뒷산이다. 나는 이 산을 수백 번이나 오르내려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이다. 감히 내 앞에서 아차산에 대해 논하지 마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나는 18년 전 이 아파트를 떠났으며, 지금은 미혼의 아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아들이 장가를 가게 되면 다시 이사할 요량이다. 아차산에 대한 추억과 미련 때문이다. 오늘은 모처럼 아들도 볼 겸 아차산을 찾았다. 1월 하순의 겨울이지만 날씨가 포근해 등산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내가 다녔던 아차산 등산로는 워커힐 입구의 좌편 주차장에서 팔각정(고구려정)을 경유하는 코스였다. 지금까지 이 코스 외에는 거의 다녀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다른 코스를 한번 밟고 싶어 주차장 우편의 능선 코스를 택했다. 

능선 정상에 오르니 구리시와 하남시 전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고 푸른 한강이 마치 아름다운 비단 물결의 호수를 연상케 했으며, 저 멀리 팔당대교가 나를 보고 반갑다며 손짓했다. 능선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가파른 왼쪽 기슭에 처음 보는 범굴사의 암자도 나를 반겼다. 오늘은 그동안 보아온 아차산의 전경과는 전혀 다른 운치를 구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아차산을 오르면서 왜 같은 코스만 줄기차게 다녔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한 코스만 뱅뱅 돌아놓고 아차산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내 어찌 다람쥐를 미련하다고 할 수 있으랴?

어떤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불현듯 생각났다. 한 노파가 고목나무 아래에서 실타래를 감았다가는 풀고 또다시 감는 일을 반복했다. 스님 한 분이 이를 지켜보다가 이상히 여겨 “왜 쓸데없는 일을 반복하느냐?”고 핀잔을 주듯 말을 건넸다. 그러자 노파는 “스님이 사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른가? 자고 나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리고 또 자고, 그것을 수십 년째 계속 반복하고 있지 않으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님은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노파께 큰절을 올리고 홀연히 떠났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되새겨볼 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지구라는 무한히 넓은 땅덩어리 속에서 내 삶의 활동반경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릴 적 동네 어떤 할머니가 “30여 리 이웃으로 시집와서 한평생 시가와 친정 외에는 가본 곳이 없으며, 시장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고, 기차도 타보지 못했다”고 한탄하던 말이 기억난다. 아무리 현대화된 세상이라고 하지만 더 넓게 보면 지금 내 생활영역이 그 할머니보다 얼마나 다를까 싶다. 그동안 수없이 올라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고 자신했던 손등만 한 아차산도 내가 아는 영역은 극히 일부가 아니었던가? 일주일 남짓 유럽의 몇 개 도시를 주마간산 격으로 보고 나서 유럽대륙을 다 섭렵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다. 

많은 사람이 박사니 전문가니 하며 남들 앞에서 큰소리친다. 그리고 박사란 호칭으로 불리기를 지극히 좋아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삼라만상의 넓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솔직히 작은 점 하나에 대해 남들보다 조금 더 해박할 따름이다. 나 역시 그 무엇에 대한 작은 지식으로 전문가인 체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싶다. 아차산은 오늘 내게 ‘매사에 겸손하며 자신을 성찰하라’는 큰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앞으로 아차산을 통해 더 많은 글감과 깨달음을 얻으리라 생각하며 하산을 재촉했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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