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의 슈바이처’, ‘톤즈의 성자’로 불리는 이태석(1962~2010) 신부는 부산의 판잣집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운 어머니의 사랑의 힘으로 어렵게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광주 가톨릭대학을 거쳐 사제가 됐다. 가톨릭의 살레시오회를 그가 찾아왔을 때 수도회 측은 의료사도직을 수행하는 다른 수도회를 그에게 추천했다. 이 신부는 “의사가 아니라 청소년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서 입회를 자원했다.
이후 내전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남수단의 톤즈로 달려가 병원을 짓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수단사람들이 앓는 말라리아를 앓았으니 이제 나는 그들과 같아졌다”면서 그들을 위해 우물을 파고 아이들에게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한센병 환자들로 하여금 하얀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게 하고 발바닥 모양을 본떠 맞춤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는 또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학교를 먼저 세우셨을 것 같다”면서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학교, 내집처럼 정이 넘치는 그런 학교, 성당이면서 학교요, 학교이면서 성당인, 교실이면서 곧 운동장인 그런 학교를 세웠다. 총칼 대신 악기를 들게 해 35인조 브라스밴드를 결성했다.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당가족 후예들에게 사랑과 눈물의 참뜻을 일깨웠다.
이렇게 그는 의사로, 음악가로, 친구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그는 그가 쓴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 서명하면서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라고 적었다. 그로부터 배운 아이들에게“그분은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줄 거야”라는 믿음을 주었고, 그래서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된 사람도 있고 토목공학을 한국에서 전공하고 돌아가 남수단의 인프라 건설에 앞장선 청년도 있다.
이태석 신부는 한국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톤즈를 잊지 못했다. 그가 “내가 없어도 다 잘 될 거다(Everything is good)”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남수단 사람들은 “인종, 종교분쟁으로 200만명이 숨진 비극의 땅에 움막 진료실을 짓고 하루 300명씩 환자를 치료한 영웅”으로 그의 삶을 교과서에 수록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해 울지 마, 네 이웃을 위해 울어.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런 이태석 신부의 삶을 조명하고,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이태석신부기념관이 2020년 1월14일, 부산 서구 천마로50번길 70에 세워졌다. 일대가 톤즈문화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에는 제2의 이태석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