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⑫] 굿모닝 미스터 PAIK
[홍미희의 음악여행 ⑫] 굿모닝 미스터 PAIK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0.05.26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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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큰 건물이 생겼다. 별생각 없이 들어간 건물의 로비에는 누가 봐도 한눈에 작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있었다. 백남준이다. 나에게 백남준은 1984년으로 시작된다. 1984년의 시작은 외로웠다. 1980년에 입학하여 다닌 대학은 다닌 날보다 안 다닌 날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 때 악기를 시작하고 예중, 예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가 됐지만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며 맞이한 새해, 그 와중에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흑백 TV 앞에서 기다렸다. 그때는 뉴욕과 파리, 서울이 같이 동시에 방송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백남준의 마음도 전혀 몰랐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니, 이 사람도 조지오웰처럼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보고 있구나. 그런 시대가 밝았다고 말하나보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우리나라가 뭔가를 같이 한다는 사실이 대단했고 세상이 달라지는 시점에 내가 서 있다는 것만 막연하게 느꼈다.

개선장군(강남구 일원동 삼성생명 빌딩)
개선장군(강남구 일원동 삼성생명 빌딩)

백남준의 세계성, 지적 호기심, 자유로움, 자존감, 본질을 바라보는 혜안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을까? 사람이 궁금할 때 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삶의 족적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청나라의 비단을 독점으로 우리나라에 공급했던 거상이었고 아버지 역시 섬유업을 했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는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중학교를 다니면서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에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하여 1952년에 동경대에 입학했고 미술사와 음악사를 전공했다. 그가 동경대에서 쓴 논문은 쉔베르크였다. 쉔베르크는 12음기법을 만든 사람으로 기존의 화음이 모두 사라진 무조음악을 만든 사람이다.

이후 1956년에는 독일에 가서 뮌헨 대학과 쾰른 대학을 다닌다. 독일에서 존케이지를 만나 전자음악에 몰입하게 되는데 존케이지는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퇴장하는 ‘4분33초’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에 플럭서스 운동으로 유명한 요제프 보이스와도 인연을 맺는다. 백남준은 1963년 독일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미술사상 최초의 비디오 아트를 선보이고, 다음해 뉴욕으로 간다. 뉴욕이 플럭서스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서양의 문화를 눈으로, 몸으로 직접 익히며 체득한 것들이 대상을 남과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수원신갈IC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5분 정도 가면 ‘백남준아트센터’가 나온다. 이곳은 백남준 스스로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착공 5개월 전 소천하여 완공을 보지는 못했다. 길에서 보이는 센터의 앞부분은 조금은 좁고 평범하게 느껴진다. 길을 따라 이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센터 쪽으로 걸어간다. 사실 이곳은 앞부분보다. 뒷부분이 훨씬 매력 있다. 조금만 걸으면 여러 명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그 공간을 지나면 잔디 언덕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낮은 야산의 정상이 이어지고 그 뒤편으로는 어린이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이 있다. 이 센터는 위에서 보면 백남준의 이니셜인 P자 모양이고, 앞모습은 그랜드피아노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이곳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표는 끊고 들어간다. 경기도에서 관할하는 곳이라 입장객을 카운트하는 등의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자원으로 봉사하는 도슨트와 봉사자가 많고 일인당 봉사기간도 길다. 그들의 백남준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면이기도 하다.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 아트센터

센터의 앞 유리에는 ‘안녕, 백남준 아트센터, 모두 안녕하세요? 백남준아트센터는 안녕!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각자 스티커를 붙이며 참여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을 만든 것 같다. 이 센터에는 다른 곳과는 다른 기운이 넘쳐 흐른다. 뭔가를 시도하고 같이 협업하고 있다. 백남준이 그랬던 것처럼.

백남준을 알아갈수록 그의 작품보다 그의 작업에 더 매력을 느꼈다. 다다익선에서는 마음이 떨리지 않았던 내가 왜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는 아직도 마음이 떨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정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초 컴퓨터프로그래밍인 포트란으로 만든 작품인 ‘에튀드1번’을 만든다. 이는 컴퓨터에 명령어를 치고 인쇄해서 만든 작품이다. 이미 디지털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 것이다. 1970년에는 미국 보스턴의 한 방송국에서 생방송으로 ‘비디오코뮨’을 내보냈다. 이는 비틀스 음악과 함께 비디오 합성 이미지를 내보낸 것으로 세계 최초의 비디오아트였다. 1984년 1월 1일 뉴욕 WNET 방송국에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뉴욕과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그램으로 심지어는 생중계로 방송됐다. 이런 작업을 보면 그가 웃으면서 말을 거는 것 같다. “이런 걸 했어, 이런 건 어때?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제 그가 만들었던 다다익선 같은 여러 작품은 기계이다 보니 멈춘 것도 있고 고장 난 것도 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개인들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멈춰선 작품을 고쳐서 다시 돌리도록 유지하는 것이 맞는지, 기계이기 때문에 멈춘 것도 작품이 변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해야 맞는지 등에 관한 것이다. 아마 그가 살아있다면 웃으면서 말할지도 모른다. “다 썩은 고철 덩어리를 가지고 뭘 하는 거야 너희들, 새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랜드피아노처럼 설계된 건물의 앞면
그랜드피아노처럼 설계된 건물의 앞면

휴관을 하고 있어 센터의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 전 센터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일 앞 로비에는 간단한 책과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다. 미술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이 뭔지 조사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문구류다. 사람들이 가볍게 살 수 있는 싼 물건이 미술관의 효자상품이다. 이런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옆에는 ‘ TV정원’이 있다. 그리고 표를 끊어서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가 있고 그 옆쪽에는 ‘백남준-데콜라주 바다의 플럭서스 섬’이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옛날 두근거리며 기다렸던 ‘굿모닝 미스터오웰’이 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조지 오웰이 쓴 ‘1984’에서 묘사했던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매스미디어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할 미래인 1984년 1월1일 방영된 생방송 위성 TV프로그램이다.

백남준은 조지오웰에게 조크를 던지고 있다. “조지오웰, 네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매스미디어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냐.” 방영된 시간은 뉴욕은 낮12시, 파리는 저녁 6시였고 한국은 다음날 새벽 2시였다. 전시관에 있는 이 작품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뉴욕이다. 왼쪽에는 에펠탑과 프랑스의 유명한 만화주인공인 틴틴의 모습도 보인다. 파리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는 요제프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뉴욕에서는 존 케이지가 연주를 시작했고, 머스커닝햄, 살롯무어먼, 이브몽땅 등 많은 예술가도 참여했다. 1983년 12월23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미불독 3개국 우주 예술제’라는 제목으로 ‘KBS는 이 우주예술가 잔치가 국내 시청자에게는 다소 생소한 점을 감안하여 1984년 1월 2일 새벽 1시부터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고 쓰고 있다. 이 작품으로 백남준은 34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외국에서 먼저 성공하고 돌아온 예술가에게는 대접이 후하다. 백남준은 외국에서 먼저 이름을 알리고 돌아온 예술가여서인지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알고 인정한다. 물론 TV 몇 개 연결해 놓고 예술가 연기 한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처음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창의적이고 새롭고 힘든’ 것이다. 과학 특히 정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운영하는 시대가 됐다. 그는 이미 1960년대에 과학의 발달과 시대의 요구를 예술과 접목하여 의미를 불어넣었다. 내가 왜 꿈결처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그리워했는지 그의 작품에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며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작품이 아니라 생각으로 자유로움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굿모닝 미스터 백, 여전히 새로우신지, 아직도 궁금한 게 많으신지, 하고 싶은 게 많으신지?”

백남준 아트센터 건축상 시상
백남준 아트센터 건축상 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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