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만난 인연
[이영승의 붓을 따라]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만난 인연
  • 이영승(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0.07.07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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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한 우리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일은 매주 목요일이다. 아내를 도와 분리수거를 시작한 것은 퇴직 후부터다. 우리 집에서 내가 맡은 유일한 가사이며 소임이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몰라도 백수가 되자 가정 내의 위치가 갑에서 을로 기울어져 가는 듯했다. 이마저 없었다면 내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분리수거를 잘 하는 편이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와 같이 분리수거를 할 때면 나는 옮기는 일만 하고 분류는 항상 아내가 다했다. 어느 날 아내가 외출 시 분리수거를 위임하면서 내가 분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못 미더워하기에 ‘별 걱정을 다 하네’ 싶었다. 그런데 분류 과정에 난감한 일이 생겼다. 코팅된 종이를 비닐로 봐야 할지 종이로 봐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옆에서 분류 중인 낯선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분은 물음에 대답은 않고 내 바구니를 들고 가 본인이 직접 분류해버렸다. 그리고는 빈 바구니에 수줍은 미소를 가득 담아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분의 과도한 친절이 고맙기보다는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분리수거도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으로 무시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미처 하기도 전에 그분은 훌쩍 가버렸다. 한동안 홀로서서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육십이 넘도록 분리수거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너무 과민했음을 자각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분리수거장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마주친 것은 2개월쯤 후다. 그분이 먼저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했다. 나도 얼른 “지난번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깍듯이 인사했다. 바로 그때 내 나이 또래의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비닐로 만든 것 같아 보이는 얇은 플라스틱 용기를 들어 보이며 “여보, 이건 어디에 버려?”하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대답 대신 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플라스틱이네요”하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남편은 몹시 겸연쩍은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지난번 내가 겪었던 심경이 아닐까 싶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하고 웃으니 그분도 빙그레 웃었다. 부인도 따라 웃었다. 

지난번 그 여인이 분리수거를 직접 해주며 미소 지은 것은 어이없어 웃은 것이 아니라 나처럼 분리수거가 서툰 남편을 생각해 친절히 대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은 정신이 없어 어떤 분인지 모습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참으로 우아한 자태의 귀부인이었다. 미소 짓는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고 인간미가 풍겼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낯선 이웃 주민에게 베푼 배려는 분명 내가 갖추지 못한 미덕이다. 말로만 듣던 이웃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작은 인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의 분리수거는 참 의미가 있었다. 나보다 분리수거가 서툰 사람을 만난 것도 재미있었으며, 지난번에 하지 못한 인사를 하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는 내게 유일한 이웃과의 소통 기회다. 그날 이후 분리수거가 더욱 즐거워졌다. 분리수거장에 나가면 혹시나 그 귀부인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게 살피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찻집에서 그 여인을 만나면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해야겠다는 생각도 가끔 하였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그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분리수거장에서 그 여인의 남편 분을 만나게 되었다. 지난번 일을 기억하며 서로 목례를 했다. 그때 머리가 희끗한 한 노신사가 지나가면서 그분에게 “김 박사, 요즘 홀로서기 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홀로서기라니? 그렇다면 부인이 장기입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졸혼이라도 했단 말인가? 부인의 근황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아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었다. 

“사모님은 요즘 어디 가셨나보죠?” “아, 예~, 손주 키워주러 지방 딸아이 집에 갔습니다”라 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쩌면 작금의 처지가 나와 똑같단 말인가? 참으로 묘한 인연인 것 같았다. 한동안 멍하니 섰다가 그분이 떠나자 나도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만나면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제의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홀로서기를 잘하는지 동병상련의 애환을 토로해보고 싶었다. 고마운 그 여인의 근황도 자연 알게 되리라.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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