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54] 이르쿠츠크의 데카브리스트
[유주열의 동북아談說-54] 이르쿠츠크의 데카브리스트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8.0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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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름은 덥다. 더구나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느 해인가 무더운 서울을 피해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안가라강과 이르쿠강이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진 인구 60만의 도시다. 17세기 중반 코사크 부대의 야영지로서 개척되었다고 한다. 안가라강의 유래는 몽골의 부랴트족 언어로 “찢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호수 북서쪽 일부가 찢어져 강이 된 것이다. 안가라강은 러시아의 북극해로 흐르는 예니세이강의 중요한 지류이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혁명 운동의 선구자였던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당원)들이 유배되어 이상적인 유럽풍의 문화도시를 만들었다. 이르쿠츠크에는 데카브리스트가 살던 마을이 기념관으로 공개되어 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볼콘스키 공작의 저택이다. 저택이라 하지만 시베리아 통나무로 지은 2층 목조 가옥으로 방마다 아기자기한 유럽풍의 가구를 넣어 시베리아 같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건물 내에는 온실도 만들어 긴 겨울에도 화초를 키우는 여유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러시아의 귀족 출신 청년 장교들이 입헌군주제와 농노해방을 주장하면서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30년이 지난 1856년 사면 복권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복귀한 데카브리스트를 만나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먼 친척이기도 한 볼콘스키 공작을 중심으로, 1812년 나폴레옹 침공을 막아낸 위대한 러시아를 조명하여 크림전쟁 패배의 상처를 위로하고, 데카브리스트 정신을 구현하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전쟁과 평화>이다.

1776년 영국의 식민지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20년 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과 식민지 쟁탈전(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굴욕을 당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재정지원을 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승리했지만 바닥난 프랑스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과다한 증세는, 민중을 자극하여 왕정 타도의 혁명으로 비화했다. 1792년 2월 프랑스의 첫 공화정의 수립되고 루이 16세는 처형되었다.

국민적 전쟁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사회적 혼란을 틈타 1799년 12월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5년 후 스스로 황제가 된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연합, 영국 침공을 시도했으나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곧이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연합군에 크게 승리, 파리로 개선했다. 다음 해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고 러시아와는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무역의존도가 높은 러시아는 영국과 무역을 이어나가자 나폴레옹은 이를 응징하고자 1812년 6월, 60만 대군으로 러시아 침공에 나섰다.

러시아의 쿠투조프 사령관의 작전은 퇴각이었다. 러시아 내륙 깊숙이 나폴레옹 군대를 끌어들여 곧 닥칠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에서 110km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모스크바 방어전을 계획했다. 보로디노가 뚫리면 옛 수도 모스크바가 점령되기 때문이다. 1812년 9월 나폴레옹 군대가 보로디노에 도착했을 때 이틀 전부터 비가 와서 벌판은 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전선 시찰을 나갔다. 톨스토이의 기록에 의하면 시종이 방수 장화를 준비하지 않아 바지가 흥건히 젖은 나폴레옹은 코감기가 들어 군대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의 1/3이 죽거나 다쳐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비는 나폴레옹의 운명을 바꾸었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도 비 때문에 대포 이동이 늦어져 연합군에 패배하여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보로디노 전투 7일 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했지만, 대화재로 모스크바가 초토화되고 겨울이 닥쳐 철수를 결정한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요청을 해 올 것이라는 계산은 착오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항복을 받지 못하고 퇴각했다는 소식에 고무된 유럽제국들은 반 나폴레옹 전선을 재정비한다. 100만이 넘는 연합군은 라인강 동쪽에 집결했다. 1813년 10월 나폴레옹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라이프치히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과부적의 나폴레옹 군대는 패배했다. 파리는 연합군에 점령되고 나폴레옹은 퇴위 되어 엘바섬으로 쫓겨갔다.

1814년 3월 연합군의 일원으로 파리에 입성한 러시아의 청년 장교의 눈에 비친 프랑스 사회의 자유주의 분위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지켜낸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전제정치와 농노제는 시한폭탄이었으며 프랑스처럼 아래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구제동맹(Union of Salvation)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구국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의 재위 중에 혁명은 어려워 보였다.

1825년 12월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 북부 황제 별궁에서 급사했다. 그는 딸을 둘이나 가졌지만, 아들이 없어 제위는 동생에게 넘어갔다. 큰동생 콘스탄틴 폴란드 총독은 신분이 낮은 여인과 재혼하여 제위 계승권을 잃었다. 당시 유럽 귀족사회의 일반화된 귀천결혼(貴賤結婚) 제도에 따라서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콘스탄틴의 제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했으나 비밀로 해둔 사이 급사했기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아랫동생 니콜라이 대공은 제위 계승을 한동안 사양했다. 계몽적 사상을 가진 콘스탄틴을 추대하려고 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니콜라이 1세 즉위에 항의,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군주제와 농노 폐지 등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1825년 12월 14일 봉기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사형 또는 유배를 보내 다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했다. 아내들이 반역자를 찾아간다면 자녀와 함께 모든 기득권을 포기케 하고 평생 시베리아를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볼콘스키 공작부인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간 여인들은 후에 러시아의 순애보 상징이 됐다. 데카브리스트의 볼콘스키 공작은 처음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시베리아 20년 노동형으로 감형되었고 노동형을 마친 그는 동료 데카브리스트들과 이르쿠츠크 신도시 건설에 나섰다. 그들이 파리에서 본 세련된 도시를 이르쿠츠크에서 실현하고 싶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자유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껴 전제 반동 정치를 강화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 프랑스의 7월 혁명(1830)과 2월 혁명(1848) 등 유럽의 자유주의적 혁명 열풍이 러시아로 전염되지 않도록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 같은 작가들의 경미한 정치범죄도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중죄로 다스렸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8년간 유배 생활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과의 크림전쟁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진 니콜라이 1세가 1855년 2월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했다. 그는 부왕과 달리 계몽적 군주로 러시아의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고자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에 사면령을 하달하고 과거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도록 했다. 1861년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누르고 농노해방령을 내려 토지에 귀속되었던 농노들의 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2차 아편전쟁(1860)을 중재한 대가로 중국(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한 반면 1867년에는 크림전쟁의 전비충당을 위하여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 온건 정책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3월 급진 인민주의자의 폭탄 테러에 의해 폭사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제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부왕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조부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가 러시아의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했다.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도 전제정치를 이어갔으나 유약과 무능으로 러일전쟁에서의 패배와 1차 세계대전으로 민심을 잃었다. 또한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으로 1917년 3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폐위되면서 300여년 간 계속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까지 가져왔다. 데카브리스트가 우려한 시한폭탄이 100년 만에 터진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 공산당 레닌에 의해 1918년 7월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2500km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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