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5] 미국에 대한 뿌리박힌 증오로 교포 인식 좋지 않아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5] 미국에 대한 뿌리박힌 증오로 교포 인식 좋지 않아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08.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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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대동강 아침

개성 판문점은 묘향산 등과 함께 늘 북한 관광코스다. 지금은 관광 인원수에 따라 자동차 운행이 많지만, 당시 첫 개성방문은 평양에서 밤 12시 침대열차를 이용했다. 북한의 열차는 단선이다. 약 6시간 걸린다. 이는 평양에서 원산행도 마찬가지. 자정에 기차는 떠났다. 러시아 특파원 당시 모스크바에서 밤 12시 침대열차로 페테르부르크(전 레닌그라드)로 갈 때와 같은 시간대다. 목적지엔 오전 7시경 닿는다. 자정 밤 열차 이동은 공산국가 특성인 것 같다. 개성 자남산 호텔에 짐을 풀었다. 

개성은 북한 도시 중 가장 많은 이산가족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안내원은 “이산가족은 80% 이상”으로 추산했다. 북강원도 경우완 반대 경우였다. 북강원도청 공무원(원산)은 “6.25 전쟁 전 살던 강원도 주민은 그 당시 거의 고향을 떠나 별로 남아있지 않소. 다른 도(지역)에서 옮겨온 주민이 많지요.” 

개성 남대문을 지날 때였다. 안내원이 차를 세우고 “원하면 남대문 위에 올라가도 된다”고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누가 국보급 건축물에 올라 폼을 잡고 수선을 떨랴. “서울 남대문 경우는 누구든 함부로 오르내릴 수 없어요. 여기 개성 남대문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모양이지요?” “그렇진 않습니다. 선생들에게 특별혜택을 주려 했을 뿐이요.”

호텔 바 봉사원(접대원) 아가씨

판문점으로 갔다. 나는 남쪽 판문점 자유의 집을 가본 적이 없다. 북쪽 판문각은 두 번 방문했다. 한 인민 군관이 해외교포들을 모아놓고 “6.25는 북침”이라는 설명을 한참 했다. 누군가 “남침인데···”하고 속삭였다. 왜 교포관광객들에게 남침, 북침을 새삼 부각시키려는지 답답했다. 서울출생인 나는 6.25(1950년)를 만 3살 6개월 때 겪었다. 일요일 갑작스러운 남침에다, 곧 한강교까지 폭파돼 남으로 피난을 못 갔다. 어머니와 한강변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며, 토마토를 잔뜩 실은 지게꾼에게서 토마토를 먹던 일이 생생하다. 이 기억 때문에 나는 세 살배기 어린이 앞이라도 함부로 처신을 조심한다. 어린이라도 인식하는 두뇌는 정도 차는 있겠지만 분명히 지닌다고 본다. 

북한에선 미국에 대한 뿌리박힌 증오 감정 영향인지 미주교포들에 대한 인식 또한 별로 좋지 않았다. 북 주민들의 미군 증오 감정은 무엇보다 황해(북)도 신천군 신천읍(사리원 부근)에서 일어난 주민살육사건 때문이라 한다. 믿기 힘들지만, 미군이 50여 일간 신천 땅 점거 때, 군 주민들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 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10월18일 방공호에 가두어 놓고 휘발유로 불태웠으며, 또 생매장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가장 잔인무도한 살육만행은 12월7일 미군들이 원암리 밤나무골 화약 창고에 어머니와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910여명을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오늘 그 밤나무골에는 그때 희생된 어머니 묘 400개와 어린이 묘 102개 합장묘가 역사의 증거로 남아있고, 신천 박물관에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이 남긴 유물과 흉기들, 당시 사진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왜 미국에 증오심이 남아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오.” 

북한에서 지난 80년대까지 운동 종목 중 야구 경기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도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 후 북에서 야구를 허용했다고 들었지만, 오늘 얼마나 많은 야구 인구가 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대신 농구와 축구는 북에서 대대적인 인기종목이다. 농구는 전국주민 운동으로 보급될 정도로 선호하며, 북한 유일한 장웅 IOC(국제올림픽위원)가 농구선수 출신이다. 

백두산에서 미 교포가 함께 찍은 백두산 안내원들
백두산에서 미 교포가 함께 찍은 백두산 안내원들

한때 국제적으로 소개됐던 2m35cm 리명훈 선수는 북미 프로농구(NBA) 진출을 위해 캐나다에 와서 연습했으나, 결국은 좌절됐다. 수년 전 백두산을 다녀온 한 뉴욕 교포는 리명훈이 백두산 안내원 일을 한다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줬다. 또 북에선 특히 수영과 태권도 두 체육 종목은 필수과목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수영과 태권도를 잘못하면 우등생이 될 수 없으며, 태권도 4단 이상이면 군대가 면제가 된다고 들었다. 

해외영접부 김선옥 부부장(44년생)과 인터뷰할 때였다. 그녀는 북 정부 정책을 설명하며 한편 방북한 일부 미주교포들에 대해 불만을 토했다.(북한에서 ‘부’ 명칭을 지닌 간부는 사실상 그 부서 실무책임자나 다름없다) 어느 부서이고 최고책임자급인 부장, 국장, 주필 등은 단순명예직에 불과할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쪽이 더 경공업 부문이 발전한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경공업이야 맘만 먹으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다”며 “우린 조국 통일신념이 강하고, 주석 영도 아래 당과 인민이 굳게 뭉쳐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주교포의 겸손치 못한 고향 방문에 불만을 토했다. 내가 본 대부분의 북미교포는 자본주의하에 자유로운 타성에 젖어선지 거리낌 없었고, 가끔 도에 지나치는 경우를 보였다. 아마 경제적으로 자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처럼 북한고향을 찾아가서도 거만스럽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안내원과 다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현대식 평양 건물들

“옛날 우리 집은 환경이 아주 좋았는데 왜 이렇게 형편없이 변했소? 누가 그랬소?” 물론 일부 교포들 태도겠으나 이런 경우, 담당 책임지도원이 난색하고 말다툼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김 부부장은 “평양에서 그 먼 고향까지 기차든, 자동차든 성의껏 안내해 줬으면 그 고마움을 알아야지, 예의도 없이 그럴 수 있나요?” 북한 간부의 말은 백번 맞는다. 

그러나 실상 꿈에 찾던 고향을 다녀온 캐나다교포들 역시 단 한 명 만족을 표명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향 함경남도 불청(북청 물장수, 북청 사자놀이로 유명)을 다녀온 한 교포는 “북청 시내에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만들어져 예전 길을 막아버렸다”고 투덜댔다. 그러면서 “예전엔 집 마당에 꽃들을 심어 운치가 있었는데, 이젠 집마다 마당에 꽃 대신 배추밭이 돼 북청이 도시인지, 시골인지 구분조차 힘들게 됐다”고 탄식했다. 그렇게 그리던 보고 싶던 고향 땅이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평양에 와서 대동강 숭어탕 맛을 못 보면 평양을 다녀갔다는 얘길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평양 숭어탕이 유명했다. 평양 거리에서 숭어탕 간판을 발견할 수 있어 하루는 숭어탕을 사 먹자고 고집해 그 식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고, 다음에 언제 문을 여는지 기약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한 적이 있다. 아마 대동강 숭어들이 그간 불경기에 낚시꾼에게 전부 잡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낚시터 공고문

89년 7월 평양축전 때다. 김일성 주석은 중국, 러시아, 일본, 북미교포들과 한 그룹씩 사진 촬영을 했다. 북미교포들 수는 1백여 명 남짓. 평양축전 직전인 5월 중국 북경에 천안문사건이 터져 상당수 미주교포가 평양행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북경을 하루 체류해야 하는데, 삼엄한 천안문사건 여파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들었다. 나는 미주교포 단체 사진 때 김 주석 바로 뒤에 서 있어 머리 뒤의 주먹만 한 혹을 관찰할 수 있었다. 또 그는 러시아, 중국 기차여행 외 서방세계 방문은 일절 안 해 그런지 해외교포 생활 수준을 잘 파악 못 하는 듯싶었다.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고생하는 우리 외로운 교포들, 모처럼 조국 고향을 찾아 얼마나 기쁘겠냐”며 “조국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할 테니 얼마든지 머물다가 돌아가라”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평양축전 행사가 끝난 뒤 다시 1주일 정도 더 체류했다. 언제 다시 방북 기회가 있겠나 싶었고, 이제는 체재비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미교포들이 오히려 낙후된 환경의 북을 도와야 하는 입장 아닌가. 거꾸로 축전 이후 식사, 호텔 등 체류비용이 모두 무료라 했으니. 이때 여분의 시간을 이용해 버스표를 입수해 안내원 없이 무단으로 시내를 돌아다녔다. 평양 거리와 약도를 외워 버스를 갈아타면서 미리 약속해 둔 식당 여종업원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가 청류 1동인데 청류 2동으로 잘못 찾았다. 지나던 주민에게 동네를 물으니 동사무소로 가라며 방향을 알려준다. 

아. 여기에도 동사무소가 있구나. 어디를 가든 내 옷차림과 카메라로 인해 외국인 티가 났는지 내 앞으로 걸어오다가 피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파트 입구 옆에는 두 아줌마가 앉아 출입구 경비를 체크하고 있었다. 어느 아파트나 입구엔 아파트 거주인 2명이 순번으로 자체경비를 선다고 들었다. 여종업원 아버지는 인민대의원(국회의원)으로 그 집에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과 저녁을 잘 대접받고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밤 10시인데도 버스엔 승객이 꽉 차 있었고, 호텔에 도착하니 내가 사라졌다고 난리가 나 있었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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