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ZOOM으로 통하는 ‘한줌세상’
[이승율 칼럼] ZOOM으로 통하는 ‘한줌세상’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8.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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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애터미(주) 대표 윤영성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몽골에 나가 있는 고재형 선교사(울란바토르 후레대 교수)가 저녁 8시(현지 시간 7시)경에 ZOOM으로 회의를 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해 놓고 소파에 몸을 눕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5년 전에 돌아가신 고재형 박사의 어머니 백사라 목사님을 회고하며 깊은 ‘회상의 못’에 빠져 버렸다.

1990년 신년 초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갔다가 극적인 변화(Transformation)를 받아 그 다음 주에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출석하는 한편 주일 오후에는 집사람이 봉사하던 순복음실업인선교회 본부에 가서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보고해 온 근황을 듣고 지원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에 같이 동참을 하게 됐다. 거기서 본부 소속의 하나로 조용기 목사께서 해외 성회를 나갈 때마다 함께 가는 찬양팀 ‘?라성가대’의 지휘자 겸 총책인 백사라 전도사(당시)님을 만나게 됐다.

나이가 18년 정도 앞선 분이라서 그때부터 나는 그분을 나의 ‘영적 대모’라 부르며 성경 말씀도 배우고 기도도 받으며 가깝게 지냈다. 실은 어머니(올해 93세, 청도대남병원에서 요양)가 16살에 결혼하신 후 열아홉에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나이도 비슷하고 초신자인 내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주셨기에 그분을 진심으로 영적인 어머니로 모시고 존중했다. 앞서 말한 고재형 박사가 바로 이분의 아들이고 어머니의 뜻을 이어 몽골 선교사로 나간 지 벌써 18년째에 이르고 있다.

그는 카이스트(KAIST)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 대덕연구단지 크리스천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던 ‘창조과학회’의 일원으로도 동역했다. 그러다 보니 학위를 마친 후 2002년 몽골국제대학(MIU)개교에 발맞춰 선교의 길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 홀연히 몽골 선교사로 떠나게 된 데는 또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 - 원동연 총장(MIU)의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그 원동연 총장이 또한 몽골 사역을 하게 된 데는 내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일화’가 있으니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고, 또 세상이 좁다면 이만큼 좁은 것이다.

#2.
원동연 박사는 서울대 재료공학과 출신으로, 나중에 한국원자력연구소(대덕연구단지 소재) 연구실장으로 재임 시에 ‘창조과학회’를 조직했으며, 부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대전에서 열린 창조과학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처음 만난 분이다. 나는 1990년 교회 입문했던 그해 10월부터 연변과기대 건립후원회 임원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그 후 대덕에 있는 크리스천 교수들과의 교류가 잦았고 그런 과정에 창조과학회 사역에도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그가 서울에 오게 되면 한 번씩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학교(연변과기대) 건설 소식도 전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중 1995년 3월경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삼성동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서 긴히 의논할 게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의 진로 결정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김영길 총장께서는 한동대 부총장으로 오라 하시고, 김진경 총장께서는 연변과기대 부총장으로 오라고 하시니 내가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라는 게 그의 고민이자 질문이었다.(참고로 말하면, 연변과기대는 1992년 9월에 개교했고 그 후 중국 교육선교의 요람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한국과 해외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 리더들과 지식인들의 협조와 지원을 받았다. 그 과정에 원동연 박사도 연변과기대 사역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한동대 설립을 주도하고 있던 (고) 김영길 총장께서도 재정 조달 및 교수인력 리크루트를 위한 대책 협의를 위해, 동병상련의 관계가 되어 김진경 총장을 자주 만나서 교류하던 때였다.)

나는 즉석에서 질문형 답변을 했다. “스티븐 코비의 책에 보면 항아리에 돌담는 이야기가 나와요. 내가 묻겠소. 항아리에 돌을 채우는 순서로 먼저 큰 돌을 담고 그다음에 중간 돌, 작은 돌을 담는 게 꽉 채우는 방법이겠소, 아니면 작은 돌부터 담고 그다음에 중간 돌, 큰 돌 순으로 담는 게 꽉 채우는 방법이 될까요?” 그러자 그는 즉시 대답을 했다.” 그야 물론 큰 돌, 중간 돌, 작은 돌 순서로 담아야지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나도 즉각적으로, 공격적으로 질문했다. “그럼 중국이 큽니까? 아니면 한국이 큽니까?’ 그가 또 즉시 답변했다. “그야 물론 중국이 크지요.” 내 대답은 명쾌했다. “그럼 중국으로 가야지요, 중국 연변과기대로 가시는 게 좋겠소”

그래서 원동연 박사는 한동대 초대 부총장의 길을 접고 연변과기대를 사역지로 택했다. 그리고 부총장으로 재임하는 기간에 그의 필생의 업적인 ‘5차원 전면교육 학습법’을 조선족학교에서 임상교육을 통해 조정 보완한 후 이를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한인사회에 전파하는 등 글로벌 사역의 대로를 열어나갔다. 연변과기대 5년 근무 후 한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마침내 몽골 울란바토르로 건너가 몽골국제대학(MIU)을 설립하여 총장을 역임한 후, ‘여기가 좋소이다’라며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연립대학을 세우고 현지 국가교육 기관을 통하여 신교육(5차원 학습법)을 보급한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 하나님 사역의 확장은 제한이 없고 그 길에 쓰임 받는 일꾼들의 행보와 진로는 그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 어린 계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 준다.

#3.
고재형 선교사는 MIU 교수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사역한 다음 연변과기대(YUST)교환 교수로 1년간 와 있었으며, 그 후 다시 몽골로 돌아가 (한국에서 세운) 또 다른 미션스쿨인 후레대학교에 부임하여 교학처장을 맡는 등 몽골 교육선교를 위해 18년째 헌신하고 있다. 그런 중에 7년 전부터 부인 허성혜 교장과 함께 ‘몽골밝은미래국제학교’라는 초중고학교를 별도로 설립, 운영해 오고 있는데, 방학 시즌에 한국에 나오면 우리 내외뿐만 아니라 ‘밝은미래학교’를 지원하는 큰아들 이동엽 원장(참포도나무병원) 식구들도 함께 자리하여 식사를 하는 등 가족 간에 깊은 우정과 선교의 동지애를 나누어 왔다. 그럴 때마다 가끔 (몸이 불편하지 않으실 때면) 나의 ‘영적 대모’ 되시는 백사라 목사님도 함께 자리해 주셔서 얼마나 행복하고 뜻깊은 해후의 시간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런 백 목사님이 돌아 가신지가 벌써 5년이 지났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회상의 못’에 빠져 있던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이끌어간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연변과기대 사역을 하는 과정에 나는 중국CBMC(기독실업회)사역의 확장을 위해서도 힘껏 노력했다. 1994년 8월에 중국 최초로 연길한인CBMC를 창립한 이후 연이어 청도, 북경, 천진, 심양, 상해, 심천에도 CBMC 창립을 주도했다. 그 후 자체적으로 가지가 뻗어나가며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각지에 세워진 한인CBMC를 기반으로 마침내 중국 전역에 한인CBMC, 조선족CBMC, 중국 한족CBMC를 합쳐 90개 이상의 지회가 창립됐으니 그 선두에 서서 박차를 가해 온 본인의 감격과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마침내 2000년 여름 천산산맥을 넘어 카자흐스탄 알마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이르기까지 CBMC사역의 길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이 또한 연변과기대라는 사역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연변과기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 있는 대학으로서 기본적으로 조선족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나는 이 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연길시 북산가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이 대학은 장차 조선족대학으로만 그칠 게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서구지역 해외동포 학생,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 학생, 일본의 재일동포 출신 학생, 한국 학생, 심지어는 북한 학생들까지도 참여하는 한민족공동체대학이 됐으면 좋겠다는 비전과 기도의 제목을 갖고 올라가곤 했다. 그 후 이런 꿈은 학생들의 숫자가 매우 약소하지만 거의 다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고려인 유학생 사역이다. 특히 중앙아시아 고려인 학생들을 연변과기대에 유치하는데 나는 최대한의 정성을 기울였다.

#4.
나와 집사람에게는 잊지 못할 고려인 역사의 ‘비극적 행로’에 연루된 사건(?)이 하나 있다. 처가 할아버지(처장조)께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중 동생 되는 분이 나의 장인이시다. 그런데 고루한 집안 풍토(순천 박씨 대종가 종손 집)에다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한학만을 가르치려고 하신 할아버지(안동 도산서원 원장 역임)의 엄한 훈육을 견디다 못해 백부 되시는 분(박정순)이 독립운동을 하겠다면서 집을 뛰쳐나간 게 1937년이었다. 그는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고 상해임시정부로 가려고 했으나 마침 그해 중일전쟁이 일어나 뱃길이 끊기자 할 수 없이 북쪽으로 올라가 중국 동북지역을 거쳐 상해로 가려고 했다. 압록강은 물이 깊어서 못 가고 두만강 쪽으로 건너가 연해주 땅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그만 소련군대(로스케)에 붙잡혀 일본 첩자라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있다가 나중에 연해주 지역 선인(鮮人)들이 중앙아시아로 소개될 때 그때 함께 휩쓸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게 됐다.

본가에서는 독립운동하러 간다고 나간 사람이 오 년, 십 년째 돌아오지 않으니 다 죽은걸로 알고 지냈으나, 무려 60년 만에 키르기스스탄에서 고택(경북 상주시 수륜면 수륜동)으로 편지가 날아왔다. 소련 해체 후 한·러 간 수교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독립국들(CIS)의 문호도 열리면서 고려인 가운데 희망자들에 한하여 귀국의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그 후 국제적십자사에 신고하고 도움을 받아 편지가 온 지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모시고 오게 됐다. 그때 처 백부의 연세가 83세이셨는데, 그때 고약한 일이 벌어졌다.

실은 처 백부가 귀국할 때 중앙아시아에서 결혼한 고려인 부인을 대동하여 오셨고, 이곳 고향 성주에는 남편보다 두 살 더 많으신 처 백모가 살아 계셨다. 그런데 그 처 백모가 남편이 살아온 것은 고맙지만 고려인 부인을 데리고 온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으셨던가 보다. 처 백모의 질투가 도를 넘치자 할 수 없이 처 백부와 고려인 부인께서 귀국한 지 석 달 후부터는 (고려인 부인이 중앙아시아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반년 넘게 서울 강남구 삼성동 우리 집에 와 계셨다. 그랬다가 김포공항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출국하는 날의 ‘출국장’ 장면인데,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김포공항 청사 출국장에는 스테인리스 봉으로 만든 디귿 형태의 칸막이로 통제되고 있었는데, 그 고려인 부인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울면서 뛰쳐나와 칸막이 바깥에 있는 처 백부를 끌어안고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이나 뛰쳐나온 부인을 공항 직원이 억지로 끌고 들어간 후 그 텅 빈 청사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두 주먹을 탕탕 내리치며 통곡하던 처 백부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 이 고려인 역사의 ‘비극의 행로’를 과연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그때 비로소 민족이 무엇인지, 한겨레의 핏줄이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내가 한민족네트워크(Korean Diaspora Network)를 국가발전의 한 중요한 자원이란 점에서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 계기가 그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연변과기대 사역에 동참한 이후 이와 같은 한민족 역사의 비극ㅡ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에 이르기까지 동북아 지역에서 일어난 한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깊이 숙고하고 동료들과 함께 늘 기도하며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사역의 지평을 넓혀 온 데는 개인적으로 이런 민족주의적 정서가 그 기초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5.
드디어 중앙아시아 고려인 학생들을 연변과기대에 유학 오도록 조치할 만한 기회가 왔다. 앞서 #3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에서의 CBMC(기독실업인회) 사역이 확장되면서 마침내(2000년도) 천산산맥을 넘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도 CBMC를 전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타슈켄트에서 골프장(18홀)을 운영하고 있던 서건이 회장(전 우즈베키스탄대사)을 알게 되면서 이분의 도움으로 CBMC 사역을 전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타슈켄트 인근의 뽈리따젤 고려인 마을(우즈베키스탄에서 생산성이 가장 뛰어난 영농마을로 선정된 곳)에 있는 만민교회(워싱턴 중앙장로교회 SEED선교회 지원으로 세워진 교회)의 관계자들을 소개받게 되어 그 교회에서 양육된 고려인 기독학생들(10명)을 면담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내가 김진경 총장께 부탁하여, 이제는 외연을 넓혀 중앙아시아 고려인 학생들을 데려와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더니 김 총장께서도 동의하시면서 우선 다섯 명만 받아 보자고 하셨다. 대외부총장이었던 나는 바로 그길로 타슈켄트로 날아가서 만민교회 담임목사의 추천으로 10명의 학생을 면담했다. 면담 결과는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 결과보고서를 읽어보시던 김 총장님이 “모두 다 똑같네, 다 데려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마침내 2001년도에 10명의 고려인 유학생들이 중국 연길에 유학을 와서 1기생으로 터를 닦은 이후 매년 7~8명의 학생이 지금까지 꾸준히 유학을 왔다. 그런 과정에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혼혈) 학생들도 소문을 듣고 유학 대열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희한하게 몽골 학생도 간혹 한두 명씩 몽골 선교사(한인) 편에 소식을 듣고 중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아마도 고려인 유학생들이 대부분 러시아어권에서 유학을 오다 보니 몽골(러시아 접경지역으로 러시아어권 영향을 많이 받았음) 학생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동료의식을 갖고 참여한 경우라 보면 틀림이 없겠다.

내가 지금껏 이렇게 빙빙 돌아서 이야기를 끌어온 것은 바로 이 과정에 연변과기대에 유학(2002년 입학)을 왔던 몽골 출신 볼로르(Bolor)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당시에 분기마다 한 번씩 연길 학교에 들러 대학 운영에 필요한 현안들을 의논하는 한편, 재학생들을 만나서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특히 고려인 유학생들은 따로 시간을 내어 밥을 같이 먹고 그들의 근황과 애로사항을 듣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고려인 유학생 특별장학금도 지원했고, 겨울방학 때가 되면 학생들이 연해주 탐방을 다녀오도록 조치하는 일도 가끔 해줘서 그런지 고려인 유학생들은 나를 만나면 ‘아버지’로 부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친근했다. 그렇게 그들을 각별하게 대한데는, 내 마음 한구석에 돌아가신 처 백부를 위시한 고려인 역사의 ‘비극적 행로’에 대한 연민의 정과 민족애가 깊은 상처처럼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6.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얼굴이다. 몽골 출신 볼로르를 학교 졸업(2006년)한 지 거의 15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줌(ZOOM)을 통해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작년 연말 방학 시즌에 서울에 온 고재형 선교사 내외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 애터미(주) 사업자 대표로 계시는 윤영성 박사(목사)도 함께 초청했다. 몽골에서 미션스쿨 ‘밝은미래초중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 내외의 형편이 좋을 리가 없다. 학교 운영도 힘들지만, 생활 자체도 각박하다. 그래서 내가 그들 내외의 사역을 돕고 또한 그들과 같이 교제하며 신앙을 갖게 된 몽골 청년들을 위해 애터미 비즈니스마케팅 요원으로 창업의 기회를 줄 수 있는 방편을 의논하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때 협의가 잘 되어 사모 허성혜 교장 선생이 애터미 몽골센터를 준비하는 기초직급이 되어 앞으로 애터미 쇼핑몰 상품을 갖고 유통업을 하려는 청년들을 모아서 교육도 하고 또 이들을 크리스천기업인(CBMC 요원)으로 육성하는 일을 관리토록 의사 결정을 했다.

그 후 몇 차례 전화와 이메일로 그쪽 소식을 듣던 중에 어제저녁 8시에 줌(ZOOM)으로 회의를 하자는 특별 제안을 받고 윤영성 대표와 함께 고재형 선교사 내외를 영상회의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40분 타임으로 영상회의를 하던 중간쯤에 고재형 선교사가 그들 내외뿐만 아니라 몽골 청년들 몇 명이 이 회의에 같이 들어오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먼저 두 명의 여성들을 소개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몰로마(Molorma)란 여성과 볼로르(Bolor)란 여성이 화면에 떴는데 그중 볼로로라고 자기소개한 여성이 왠지 눈에 익고 어디선가 많이 봤던 얼굴 같았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업무적인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데 볼로르라는 여성이 나를 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디서 만났지요? 라고 묻자, 연변과기대 출신이고 고려인 유학생들과 같이 공부했다고 하지 않는가! 소름이 끼치듯 전율을 느꼈다.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오래전 일이지만 연변과기대 고려인 유학생 모임을 할 때 그를 봤던 기억이 났다. 어찌 이런 일이!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그때부터 애터미 사업 얘기는 뒤로 미루고 학교 졸업 후에 있었던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 2006년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UN 기관에서 일했고 그 후 2010년에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아 기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공무원이고 지금 지방 출장 중이라 인사를 못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최근에 고재형 선교사 편에 애터미 이야기를 듣고 유통업을 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영어도 잘하지만 한국어도 손색없이 잘했다. 내가 영어가 부족해 한국어로 대화를 했더니 다른 방에 있던 몰로마라는 여성이 한국어를 모르니 궁금해서 자꾸 끼어들자 볼로르가 대신 친절하게 통역해 주기도 했다. 몰로마는 고재형 선교사가 사역을 시작했던 몽골국제대학(MIU)의 1기 입학생으로 현재 긴급재난구호재단(NGO)에 근무 중이며 비즈니스마케팅을 전공했다고 한다.

#7.
암튼 세상 참 많이 좁다 싶었다. ZOOM이란 도구가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고맙고 기특하게 여겨진다. ZOOM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 있는 수십 명의 인원이 동시다발로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문자 그대로 지구촌 세계가 ‘한줌’의 세상이 된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불현듯 이 ‘한줌의 세상’이란 문구를 ‘한줌세상’이란 말로 축약해서 명사처럼 사용하면 ZOOM의 장점을 더 잘 드러내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으로> 이라는 제목을 달고 이 글을 쓰게 됐다.

ZOOM을 통해, 그동안 30년 가까운 세월의 여러 모퉁이에서 ‘인연의 망’을 통해 만났던 분들과 잊을 수 없는 사연들? 백사라 목사님과 그의 아들 고재형 선교사 내외, 고 선교사를 몽골 사역지(MIU)로 초청한 원동연 총장과 그 원 박사를 한동대가 아닌 연변과기대로 가도록 이끌었던 일, 그리고 연변과기대 사역을 기반으로 중국 넓은땅에 CBMC의 숲을 이루고 마침내 서건이 전 우즈베키스탄대사의 도움으로 고려인 유학생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가슴 한켠에 깊은 상처처럼 묻어 두었던 처 백부와 고려인 부인의 그 애절한 이별의 ‘비극적 행로’, 그로 인하여 한민족네트워크의 인적자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연변과기대를 통해 한민족공동체교육선교의 활로를 열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만났던 고려인 유학생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들 속에서 잊어버렸던 볼로르의 얼굴을 마치 ‘기적의 창’으로 본 듯 ZOOM을 통해 발견하게 됐으니 , 이 모든 기억을 ‘한줌의 세상’으로 집약하여 눈앞에 펼쳐준 ZOOM이야말로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영상기술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오늘날 코로나 감염병 팬데믹 현상이 세상을 온통 먹구름처럼 덮고 있는 이 시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툴(tool)이 아닐 수 없다. 글이 길어지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혹시 복잡하게 들렸을지 모르나 끝으로 이 한마디는 남기고 글을 마칠까 한다.

어차피 인생은 ‘한 줌’의 스토리 텔링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ZOOM을 통해 ‘한줌세상’을 바라보며 지구촌 곳곳에 있는 사람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지구인이 되어보자. 이념편향과 진영논리가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줌(ZOOM)이, 좁디좁은 ‘이념과 진영의 덫’을 뛰어넘어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나누며 사랑과 우정을 전해주는 드넓은 ‘줌(’준다’의 명사형)’의 도구로 애용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런 뜻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고맙고 행복한 주말을 보냈으며, 특히 ZOOM을 개발한 중국계 미국인 에릭 유안(Eric S. Yuan)를 높이 칭찬해 주고 싶어졌다.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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