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실향민 정주영과 ‘현대가’의 통일 비전-1
[이승율 칼럼] 실향민 정주영과 ‘현대가’의 통일 비전-1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10.0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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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간척지와 국제옥수수재단에 얽힌 이야기

#1.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수요일(9/30)부터 주일(10/4)까지 5일간이다. 원래는 매년 청도 동생 집(이 승무, 화가)에 내려가서 지방(대구, 청도, 울산, 포항 등)에 있는 형제 식구들과 같이 명절 추도예배를 드린 후 선산에 가서 성묘한 다음 대남요양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올해는 이것저것 아무것도 못 하고 말았다. 코로나 방역 2단계 연장 조치로 입원자 면회가 여전히 통제를 받는 상태라 어머니를 뵙지도 못할뿐더러 당국에서도 귀성 자제를 요청하고 있다. 굳이 고향 방문을 강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싶어서 올해는 지방에 있는 형제들만 성묘를 다녀오도록 의논했다. 그리고 우리 내외는 서울에 있는 치과 동생(이승건 원장)과 세종시 고려대학교 분교에 초빙교수로 와 있는 여동생(이승현 박사), 2남 1녀 자식들을 토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 모이게 해서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그 외 연휴 기간에의 일정은 각자 알아서 하기로 했다.

나는 이 연휴를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 조금 고심해 봤다. 처음에는 연휴 동안밖에 나돌아다니지 않을 작정으로 연휴 이틀 전에 무좀 걸린 발톱(왼발 엄지발가락)을 뺐다. 그러나 막상 5일간 계속 ‘집콕’으로만 있다고 생각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요일(10/1)부터 토요일까지 3일간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분들 가운데 특별히 추석 연휴 중에서 가장 외롭게 지낼 것 같은 분들 세 가족을 택해서 식사대접을 하기로 마음먹고 연락을 취했다.

첫째 추석날 점심은 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 봉사 시절 지도 목사로 계셨던 전 응원 목사님 내외분을 모시기로 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이지만 늘 동년배 친구처럼 대해주신 데다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우리 집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분이시다. 더구나 그분은 월남전 고엽제 피해자로 후유증을 앓다가 결국 육종암과 전립선암 수술까지 받은 상이용사 2급 환자이시다. 둘째 날에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15년 전 중국에 공무 출장을 나왔다가 친척(조선족)들의 만류로 복귀하지 못하고 탈북 상태로 있게 되자 하나뿐인 딸 아이(남편은 일찍 사별)를 중국으로 데려와 초등학교(조선족 학교)를 마친 후 한국으로 건너온 탈북민 차 서연, 송 미향 두 모녀를 만나기로 했다. 두 모녀 모두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으며 어머니 차 선생은 그동안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에 통일교육 강사로 적을 두고 통일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초등학교 통일교육에 참여했던 분이시다. 불행히도 작년에 폐암 수술을 받고 사회활동을 거의 못 하는 형편이다. 

끝으로 셋째 날 토요일 점심시간에는 연변과기대 김기현 교수를 만나기로 했다. 한 달 전 연변과기대 교수진들(24명)이 가을학기 수업을 위해 전세기를 타고 심양을 거쳐 연길로 갔는데, 그때 캐나다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합류하지 못하고 (지난 3월 코로나 발발 직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온 후 발이 묶여 지금까지 7개월간 머무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 내외가 특별히 지원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유학생들의 지도교수로 그동안 다년간 수고를 해 주셨다. 이렇게 세분 가족을 대접하는 것으로 2020 추석 연휴 친교프로그램을 잡았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일’을 실천해야 청도 대남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를 조금이나마 보상하는 길이 될 것 같은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렇게라도 해야 슬프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더욱 골똘히 하다 보니 문재인 정부가 최근 두드러지게 친북 정책을 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조차 하나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불만스럽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하다. 착잡한 기분으로 이것저것 이산가족에 관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그 옛날 소 떼를 몰고 북한에 쳐들어가듯 가서 남북한의 막힌 담을 헐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위업을 끌어낸 실향민 정주영 회장에 대한 추억이 자꾸만 상기되어 떠올랐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집사람은 성북동 현대영빈관 조경공사 직후 인사를 했지만)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주영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양수리 별장을 대통령 여름 휴가용으로 쓰기 위해 긴급공사 형태로 발주한 ‘시설 정비 및 조경공사’를 우리 회사가 맡아서 한 달간 ‘돌관작업’을 했을 때의 현장에서다. 1986년 7월 경이다.


#2
대통령을 모시는 현장이었기에 정 회장께서 무척 신경이 쓰였는지 일주일에 한 번꼴로 현장을 다녀가셨다. 건축부에서 주택 보수공사를 해야 할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옥외 운동 시설(풀장을 메꾸고 테니스코트를 만드는 일) 및 보안 경비를 위한 시설물 설치와 조경 작업이 태반인 공사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 달간 열심히 일했다. 그때 우리를 보고 ‘현대보다 한발 앞서 일을 챙기는 별동대’라는 인식이 주어질 만큼 돌관작업을 통해 현대건설 수뇌부에 어필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그때 정 회장께서도 우리 내외를 유심히 관찰할 기회를 가진 셈이다. 자연히 작업반 총책인 내가 가까이에서 인사를 드릴 기회가 많았다. 하루는 정 회장께서 오셨다가 떠나는 길인데, 별장의 진입로에 덤프가 들어오다가 길이 좁아서 거의 막히다시피 한 길을, 현대 직원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덤프 옆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막혀 있는 것을 보시고는 대뜸 오토바이 뒤를 밀면서 "길이 막혔다고 안 나가고 있으면 어떡하나! 이것 봐! 이렇게 밀어주니까 나가잖나!" 하시면서 오토바이를 밀치고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때 보고 느꼈던 정주영 회장님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 이후 나의 건설 인생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북한에서 건축 및 교육사업을 밀치고 나가는 데 특효약과 같은 교훈이 되어 주었다. 

그 2년 전(1984년)에도 서산간척지 B 지구 최종 물막이공사를 할 때,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해 방조제 마지막 구간을 메우는 작업이 큰 난관에 부닥쳤을 때 정 회장이 25만 톤 규모의 폐유조선을 끌고 와서 급류를 막아 놓은 다음 물막이공사를 마무리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이름하여 ‘정주영 유조선 공법’이다. 이런 사실에 더하여 양수리 별장에서 정주영 회장의 ‘장애물 밀쳐나가기’ 리더십을 목격한 다음, 그동안 뉴스로만 들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울산 현대조선소 설립 경위, 중동 건설 수주 등 여러 분야에서 발휘한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창조적 예지’와 ‘적극 의지’,’강인한 추진력’에 대한 탁월성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체감했다. 그 후 ‘정주영 리더십’을 익히고 본받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근 팔 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 뵌 현장이 앞서 얘기한 서산간척지다. 

두 번째로 정 회장님과 조우했던 때는 우리 회사가 서산간척사업 준공을 위한 산림 훼손복구작업을 맡아서 2년 차로 일했던 1994년경 가을이다. 그때도 추석이 곧 다가오던 시점이었다. 서산간척지 A, B 지구 물막이 공사를 끝낸 후 간척지 내부 개답을 마치고 시험 영농을 개시한 지 칠팔 년이 지나간 때였다. 간척지 전 면적은 여의도 33배 규모에 달하는 3,200만 평이었으며 서산시 부석면 창리 일대에 70만 평 규모의 서산농장을 조성하여 소(한우)를 방목하는 등 농업과 목축을 겸한 시범영농단지를 준비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정 회장께서 서산농장 벼농사 작황을 둘러보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현장 소장이 급히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현장으로 내려갔다. 현장에는 건설토목팀 일부 인원만 남아 있고 대부분 농장관리 요원들과 간척사업 준공 및 결산을 위한 공무 팀뿐이었다. 정 회장께서 직원들을 치하하신 다음에 회식이 벌어졌다. 간척지 내 호수에서 잡아 온 꽃게로 만든 꽃게탕이 일품이었다. 정 회장님과 길게 대화하지는 못했지만 오래전에 일했던 양수리 현장을 기억하시고 인사를 받아 주셨다. 그때만 해도 70대 말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해 보이셨다. 그날 나는 정 회장께서 현대건설 직원들에게 훈시했던 인간적인 희망 사항, 즉 실향민으로서 고향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듣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하셨는지 밭을 개간한다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하셨어. 돌밭을 일궈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드신 거야. 솔직히 말해 아버지께 이 농장을 바치고 싶다" 나는 그의 이러한 소망과 다짐이 훗날 서산농장에서 키운 소 떼를 몰고 북한으로 가서 남북관계에 새길 열어젖힌 통렬한 비전과 열정의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고 믿는다. 

내가 세 번째로 정 회장님을 만난 일시와 장소를 얘기하려고 지금까지 너무 긴 얘기를 끌고 온 것 같다.
세 번째로 그분을 만난 날은 1998년 3월 13일, 광화문 프레스 센터였다. ‘국제옥수수재단’ 창립식이 있던 날이다.


#3
여기서 잠시 말문을 돌려 국제옥수수재단을 창립한 김순권 박사에 관한 얘기부터 나누어 보자. 내가 한국일보 등 신문에 난 김순권 박사의 칼럼을 읽고, 큰 관심을 두고 그에 대한 예비지식을 공부한 다음 대구 불노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간 것이 1996년 추석 하루 전날이었다. (나는 구정과 추석 명절에 부모님이 계시는 대구에 빠짐없이 내려갔었는데, 그해 추석에도 대구에 도착하여 본가에 가기 전에 먼저 김 박사의 집을 전격 방문했다) 그는 당시 나이지리아에서 ‘슈퍼옥수수’ 개발로 이름을 떨친 다음 1995년 말에 귀국하여 이듬해 신학기부터 경북대 농대 교수로 자리 잡은,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울산 농고/경북대/고려대/하와이대 학위를 거쳐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서 17년간 옥수수 품종 개량에 매진하다가 금의환향한 케이스다. 그의 특장인 ‘슈퍼옥수수’ 개발 품종은 흔히 수원 19, 20, 21호라고 부르는데 이 품종은 아시아 최초로 생산량이 3배가 되고 병충해에 강한 ‘하이브리드’형 개발 품종이다. 

김순권 박사의 집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였다. 그는 대구순복음교회 신자였다. 처음 만났지만, 그 사실을 알고는 나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닌다고 터놓고 얘기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그 후 우리들의 대화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나는 연변과기대 사역을 소개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김 박사께서 북한에 슈퍼옥수수를 보급하여 북한의 식량 자급뿐만 아니라 장차 수출까지 가능하다고 쓰신 칼럼을 읽고 무척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북한의 길이 모두 막혀 있어요. 이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연길 저희 대학에 농업연구소를 만들어 거기서 먼저 임상을 하면서 북한 옥수수 전문가들을 불러내 같이 연구하고 교류하다가 때를 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들어가는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이런 방안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고, 그걸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해 12월 초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여 MOU를 한 다음, 이듬해(1997년) 3월에 공식적으로 연변과기대 산하 ‘동북아농업개발연구소’를 개소하고 소장(겸임 교수)으로 취임했다. 

김순권 박사는 연변과기대 교정에 조그만 텃밭을 일구고 몇 가지 신품종을 파종하는 한편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협력으로 연길 근교 농장에도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그는 연길에 자주 출장을 왔지만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없어서 연변과기대 교수와 학생들을 보조 요원으로 지원하여 연구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해 주려고 애썼다. 가을 추수기에 얻은 결실을 갖고 학교에서 품평회도 했다. 첫걸음이라 만족할만한 결과는 아니지만, 수확량이 아시아 지역 일반 수확량과 비교하면 1.5배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북한 육종학자를 불러내 연변과기대에서 함께 연구하고 임상토록 추진했으나 우리 뜻대로 되지 못해 김 박사가 무척 아쉬워했던 점이다. 나는 김진경 총장께 특별히 당부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려 최선을 다했으나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왜냐면 김 총장께서 김일성 주석 사망(1994.7.8) 후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나진과학기술대 설립을 재개하려고 북한에 들어갔다가 국가전복음모죄로 42일간 구속되어 고초를 겪은 후 중국으로 추방 형태로 풀려 난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라 북측의 협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 이 내용은 졸필 "유언을 통해 배우는 교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그런 상황 가운데 예상치 않은 돌발 변수가 생겼다. 

15대 대통령 선거(1977.12.18)를 2주 정도 앞둔 시점이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김순권 박사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진영에 참여했다. 입당할 때 김대중 후보로부터 직접 인준서를 받는 장면을 실황 중계해 주어야 입당한다는 조건으로 참여했다는 뒷소문이 있을 정도로 정치 감각과 협상력(?)이 뛰어났다. 입당 후 그는 대구에서 추미애 의원과 함께 외로운 유세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반사적으로 삽시간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나는 그를 만나기가 대통령을 만나는 그것만큼이나 어려워졌다. 해가 바뀐 후 북한 진출에 특임을 자처하면서 내왕을 시작한 이후 우리(연변과기대)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더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우리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런 과정에 그는 방북 직전에 정주영 회장의 부탁을 받고 정 회장의 고향인 통천에 가서 숙모를 만나서 영상 촬영해 정 회장께 전달했다는 일화를 언론 인터뷰에서 자랑하기도 했다. 

김순권 박사는 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1998.2.25)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된 3월 13일, 드디어 국제옥수수재단을 창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 창립기념식에 축하하러 간 자리에서 정주영 회장님을 (서산간척지에서 뵌 후 거의 4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가까이 가서 인사드리려 했지만, 중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어서 행사가 끝나고 아들 정몽구 회장의 부축을 받아 퇴장하실 때 잠시 묵례로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알아보신 것 같았다. 특유의 소박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머리를 약간 끄덕여 보이셨다. 그것이 정주영 회장님과의 마지막 상면이 될 줄이야! 김순권 박사의 뒷얘기(언론 인터뷰)를 들어보면 김 박사가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북한 진출 및 협상의 창구역이 될 것이란 소문이 돌자 정 회장께서 그를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금강산관광 사업, 서해 석유 시추사업, 고향 통천에 있는 친척 방문 등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고 한다. 나도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정 회장께서 국제옥수수재단 창립에 5억 원을 지원했다. 이 사실은 창립식 때 김 박사가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직접 사의를 표한 말이니 틀림없는 일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정 회장님을 만나본 자리는 2001년 3월 21일 현대건설 본사에 마련된 빈소였다. 그 제단 위에 걸려 있던 영정 사진이 지금도 내게 이렇게 말씀을 걸어 오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 " 이 사장, 하면 된다고 내가 말했지? 나는 떠나지만, 자네는 남아서 평양과기대를 통해서 내가 못다 한 일을 마저 해줘! 나는 소 떼를 몰고 갔지만, 자네는 사람들을 몰고 가서 그들을 이겨내야 해! 그들도 사람이야. 소통하고 협력하면 언젠가 새날이 올 거야! 난 그걸 믿어! 잘 부탁해!" 내가 왜 이렇게 말하냐면, 그해 2001년 3월에 북한 교육성 이름으로 평양과기대 설립허가서가 나왔고 이를 근거로 한국 통일부에서 6월에 남북합작 교육 특구로 평양과기대 설립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하고 대외부총장과 건축위원장을 역임했던 입장에서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 2001년 3월에 떠나신 그분이 내게 이 소임을 맡기셨다고 믿어질 정도의 확신이 무슨 파문(?)처럼 밀려 왔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고 귀감으로 삼았던 만큼 그 생각은 결코 흔들림 없이 통일의 그 날까지 나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위력이고 ‘현대정신’으로 무장한 통일 비전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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