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실향민 정주영과 ‘현대가’의 통일 비전-2
[이승율 칼럼] 실향민 정주영과 ‘현대가’의 통일 비전-2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10.0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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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떼 방북 사건

#1.
김진경 총장께서 황해남도 용연군에 있는 김정일 목장에 소(한우)를 키우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은 1993년 초부터였다. 그때 협력을 해주신 분이 신의주와 평양 중간쯤에 있는 정주 출신으로 한국을 거쳐 호주에 이민 가서 오랜 기간 축산업에 종사했던 K 사장이셨다. 당시 60세가 넘었던 이분은, 김 총장께서 북한 축산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 ‘일’을 수행하면서 고향 땅에도 자주 드나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매료되어 호주에서 운영하고 있던 목장을 현지인에게 넘겨주고 단신으로 단둥에 와서 소(한우) 감별 작업을 시작했다. 연변지역과 심양시 부근에 있는 조선족 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우량종을 감별하여 단둥에 있는 임시 사육장으로 모아서 1차로 300두를 키우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대부분의 소는 코뚜레를 한 어미 소로 잘 훈련되고 튼튼한 ‘일 소’들이었다. 나도 김 총장님을 따라 두 번이나 단둥에 다녀오기도 했다. 드디어 그해 5월에 한우 300두를 20대 넘는 트럭에 분승시켜 압록강 철교를 줄지어 넘어가던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 후에도 2년간 두 차례에 걸쳐 150두가량을 더 키워주었다. 이런 ‘일’로 인해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선자유무역경제특구를 주관했던 김정우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삼년상이 끝난 후) 김정일 위원장을 옹립하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숙청당했을 때(1997년) 그 사건에 연루되어 42일간 구속됐다가 중국으로 추방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3년간 북한 출입을 금지당했던 김진경 총장의 심경을 누가 다 헤아려 줄까? 북한 사역은 이래서 참으로 힘들고 우여곡절이 많은 법이다. 아무튼, 이런 정황에 있을 때 1998년 초 현대그룹 비서실로부터 용연군 목장 소(한우) 입식 건에 대한 자료를 협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김 총장께서 ‘대외비’로 갖고 있던 사진과 통계자료를 복사하여 보고서 형태로 정주영 회장실에 제출해 주었던 게 기억난다. 누가 이런 자료를 참고용으로 받아 보도록 건의했는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김순권 박사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물론 현대서산농장에서 키우고 있던 소 떼를 몰고 방북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오래전부터 정주영 회장 개인이 꿈꾸며 구상해 왔던 일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다.

#2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 사건에 관한 관련 기사 및 자료는 아주 많다. 그중에서 가장 명료하게 정리된 자료로 추천하고 싶은 글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온 아티클이다. 이를 요약하고 첨삭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개설>
1998년 6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 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라고 그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가족으로 동생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과 아들 정몽구 회장이 대동했다.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은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

<역사적 배경>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실향민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경영자가 됐다. 그는 17세 때 현재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 집에서 부친의 소 판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후 쌀집 배달원, 자동차 수리공장과 건설회사 사장을 거쳐 글로벌 기업가가 됐다. 그뿐 아니라 언젠가 고향을 찾아가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그의 나이 83세가 되던 1998년 6월16일 소 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하게 된 것이다. 방북 날 오전 정주영 회장은 “1마리의 소가 5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간다”고 그 감회를 밝힌 바 있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 방북을 기획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주면서 언젠가 다가올 방북을 준비하자고 지시했다고 한다. 소 떼 방북 당시 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간척지에 조성된 현대서산농장 70만평의 초원에는 3.000마리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경과>
정주영 회장은 1988년 6월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차분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50대에 실린 소들이 오전 9시22분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고,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4개월 후 2차로 5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2차 방북이 이루어졌다. 현대그룹은 소 떼 방북을 위해 트럭과 사료를 포함하여 41억7,700만원을 부담했다. 1988년 10월27일 2차 방북 시, 김정일 위원장이 방북 4일째인 10월30일 밤 10시25분쯤 정 회장의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아 ‘깜짝 면담’이 이루어졌다. 김 위원장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라면서 명예회장 선생께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직접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김용순 아태위원장에게 9월25일로 잡았던 금강산 관광이 기대보다 늦어진다고 말하자 김 아태위원장은 곧 실현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금강산관광 외에도 북한 연안(발해만)에 대한 남북 공동석유 시추작업 등 경협사업이 논의됐고, 면담은 45분간 진행됐다. 다음날 정주영 회장 일행은 개성공단이 들어설 6,600만㎡를 답사했다.

<결과>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당시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남북관계가 풀리고 민간차원의 경제협력과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1차 방북에서 정 회장은 6월 23일까지 8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평양, 원산, 금강산 및 고향인 통천 등을 방문했으며,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서해안 공단 사업 및 전자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2차 방북 직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어 1998년 11월 18일 동해항에서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1999년에는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해 대북사업을 전담토록 했다. 드디어 2000년 6월15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으며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의의와 평가>
정주영 소 떼 방북 사건은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거쳐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통해 민간인이 북한에 들어간 첫 사례였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에 힘입어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1차 500두, 2차 501두를 합쳐 1,001두로 방북한 이유는 ‘1,000+1’, 추가된 1마리의 황소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정주영 회장의 통일비전을 상징한다. 당시 소 떼 방북 장면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CNN에 생중계됐으며 외신들도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휴전선이 개방됐다고 보도했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 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엔 ‘황소 외교’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며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이를 가리켜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3
정주영 명예회장의 남북한 통일관을 조감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항목의 정책적 대안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게 많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경제통일 우선 정책이다. 그는 평상시 “통일 비용만 부담으로 여기는데 분단 비용은 왜 생각 안 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매년 늘려야 하는 국방비 부담과 한창나이에 학업이나 일할 나이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기회비용도 엄청난 손실금이라는 게 그의 실물 경제적 관점이다. 그리고 북한의 자원 및 노동력에 남한의 기술, 자본, 경험, 세계 시장 기반, 경영 능력 및 국제 투자 유치까지 어우러지면 국토개발뿐만 아니라 산업의 고도화와 일자리 창출이 겸하여 확장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되고, 이러한 남북한 통일경제 발전은 주변국 특히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위협할 정도의 국력 신장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그들이 사는 체제와 정치 현실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되어, 차츰 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고 인간적인 삶의 질을 추구하는 정상 국가로 발전할 것이라는 게 정주영 회장의 정치 철학적 지론이다. 

둘째, 민간주도 우선 정책이다. 세계적으로 공급망 관계 구조 및 자유시장경제 질서가 급속히 확대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 위주로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을 이끌어 가기보다 민간베이스의 소통과 협력, 투자 및 기술혁신 등을 존중해 주고 앞세우는 혁신사회 발전형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민간 능력을 최대한 배양하고,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기업가 정신을 함양하여 세계 속에서 그 기량을 돋보이도록 하는 게 급선무이다. 이런 생산성 있는 창조 사회적인 풍토를 만들어야 나라도 발전하고 기업 이윤과 가계 소득도 향상된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신인도를 높이는 최선의 능력과 매력을 갖추는 방법이기도 하다. 북한 사회도 결국은 이런 민간주도의 체제로 바뀔 때 국가 발전뿐만 아니라 민족공동체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통일의 기회를 순조롭게 앞당길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현대그룹이 글로벌 기업군으로 성장한 비결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셋째, 유라시아 선도형 통일국가 발전론이다.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북한 강원도 통천이다. 그는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을 그리워하며, 북한을 거쳐 중국으로, 러시아로, 유럽으로 나가는 비전을 품고 늘 그 돌파구를 만들어 가려고 애를 써 왔다. 그러다 보니 북한 경유 자체가 이미 통일을 염두에 둔 사업 전략이요 물류 정책적 기반이 됐다. 그가 대북경협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방향성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고, 휴전선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유는 곧 그 일 자체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소 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은 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러시아 지도자 고르바초프 같은 인사를 열심히 만나고 현대건설과 조선소의 업역을 극동 연해주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현대호텔을 세운 일만 해도 이미 마음속에 이런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가 그 현대호텔 조경 및 부대 환경시설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널리 듣고 보고 인지한 바다. 정 회장은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을 대고구려를 회복하는, 한민족통일국가로 가는 통로요 시금석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4
여기서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 사건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남기고자 한다. 1998년 6월16일,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를 싣고 통일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향하던 당시 방북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아라. 언론에서 대표적인 홍보용 사진으로 채택한 장면, 즉 정주영 회장께서 목에 화환을 두르고 소에도 장식용 목걸이를 걸어 주려고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진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첫째, 대부분의 소가 코뚜레가 없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목과 소머리에 밧줄을 느슨하게 묶어 놓았을 뿐이다. 둘째, 대부분의 소가 1~2년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 소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암소가 많은 편이고 이 암소들은 대부분 임신 중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코뚜레가 없는 어린 소는 일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서산농장에서 그냥 방목해서 키웠기 때문에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소들이다. 한마디로 ‘일 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암소를 많이 싣고 간 것은 정주영 회장의 특별 지시로 깊은 정성이 담긴 조처였다. 즉, 한 마리라도 더 북한에 보내 주려고 임신한 소를 골라서 실었다는 게 현장 실무자들의 답변이다. 문제는 이 소들이 황해남도 용연군 목장에 도착해서 몇 개월 못 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유가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소들을 트럭 1대당 10마리씩 분승시켰는데 적재함이 넓어 개체 간 거리에 여유 공간이 있다 보니 겉보기로는 안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트럭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구간을 달릴 때 서로 부닥치는 횟수와 강도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소들이 모두 속 골병이 들었다는 얘기다. 

암소는 또한 새끼를 배고 있어서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거기에다 대부분 코뚜레가 없고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어린 소들이라 농사를 짓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키운 지 얼마 있지 않아 겨울이 닥치자 먹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퇴비용 볏단이나 사료를 먹여서 키워야 했으니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들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바친 소중한 선물이니 애지중지(?) 잘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날이 갈수록 더 중하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자빠지니 이 일을 어떡해! 결과적으로 1년이 지나고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소를 다 잡아먹고 말았다고 한다. 아마도 죽기 전에 인민들의 보양식으로 처리하는 게 더 명분이 서는 일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디. 몇 년 후 평양과기대 건설 현장에 갔을 때 인편으로 전해 들은 바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인간사에는 처음에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과에 가서 엉뚱한 피해를 보거나 오해를 살 때가 많다. 정주영 회장의 극적인 퍼포먼스 들러리로 방북한 서산농장의 소 떼들은, 시작은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일 소’로 써먹지는 못하고 ‘식용 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배고픈 인민들 처지에서는 화가 아니라 도리어 복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20세기 마지막 전위 예술’을 통해 이룬 정주영 회장의 업적은, 개인적으로 세계적인 명예를 획득하고 기업의 위상을 드날리는 기회를 얻게 됐을 뿐 아니라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방문의 꿈을 이루는 쾌거가 됐으며, 나아가 국가적으로는 이 위험한 사건(?)을 승인한 대가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선대(김영삼 대통령, 김일성 주석)들이 이루지 못한 남북 정상회담의 큰 꿈을 이룬 한편, 이전에 감히 상상도 못 했을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업적을 쌓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 1,001마리를 내놓고 한반도의 이정표를 바꾼 ‘대박 사업’을 벌린 것과 다름없다. 남북 간에 이보다 더 큰 정치적 비즈니스의 성과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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