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2] 이념이 만드는 역사는 늘 폭력적이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2] 이념이 만드는 역사는 늘 폭력적이다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2.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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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2020 북한연하장우진호그림

고려호텔 1층에 다방(찻집)이 새로 생겼다. 92년 2월 호텔에 들어서자 왼쪽 다방에서 간드러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잠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으니 앞 외환교환소 접대원(담당 여성)이 알려준다. “저 노래하는 동무, 유명한 인민배우 김광숙이에요.” 평양 분위기는 서구풍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재정 상태는 예전보다 가라앉은 듯했다. 특급호텔인데도 전력 사정이 안 좋았다. 복도는 컴컴했다. 지난 89년 평양축전(세계청년학생축전) 때 막대한 국가재정을 소진한 결과인지 모른다. 나중 평가지만 92년 말부터 국가 배급제에 조금씩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한다. 급기야 북한표현대로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다시 도래된 시발점이 된 듯싶다. 그때 평양에 살던 한 주민(탈북자)은 축전과장 집에서 “남조선은 88올림픽으로 부흥하고, 우리는 평양축전으로 망한다”는 말이 진작부터 나왔다 한다.

92년 취재 방북 때는 북측에서 실수로 초록색 기자 완장을 주었다. 원래는 노란색 외신기자 완장이 전달돼야 했다. 초록색은 북측 국내기자 용이다. 안내원이 용품을 잘못 수령해 왔으나, 그대로 초록 완장을 내내 팔에 끼고 다녔다. 사실 누구도 색깔에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평양 소년단

또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그때는 북한 간부고, 일반주민이고 미국교포를 별로 안 좋아했다. 내가 캐나다에서 온 것이 다행이었다. 한 예다. 외화환전소 교환원은 “미국교포에게 한번 너무 혼이 났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한다. 내용인즉 미화를 환전해 줬는데, 해당 미 교포가 1백달러 지폐 한 장이 부족하다고 계속 고집했다는 것이다. 1백달러는 그들에게는 더욱 큰 돈이다. 몇 번이고 재고된 돈까지 계산해도 못 찾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다. 그런데 한참 뒤에 “아. 맞아요. 내 주머니에 있었소” 하더니 미안한 표정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가버렸다고 한다. 속으로 ‘그거야 사람 나름이지. 미 교포라고 꼭 그런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국교포에겐 더 조심하고 눈여겨봤다고 한다. “미국교포는 대부분 건방지고 겸손치 못해요”라고 주장한다.

양각도 특급호텔이나 고려 특급호텔 등지에서 일하는 식당 웨이트리스(종업원)나 상점 판매원들은 집안이 만만치 않다. 그들 부모는 정부 외교관이나 인민대의원 등 고위급 소속이 많다. 손님 접대하는 봉사원이라고 함부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일부 미주교포들은 반말로 하대하는 경우가 많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북한은 한국 사회와 시스템이 다르다는 점을 새겨둬야 할 것이다.

북한 신의주 야외 극장

김주회 해외 영접부장은 대화 중에 “미주통일단체가 그들끼리 알력이 심해요. 왜 그런지 서로 협조를 못 하니 유감”이라고 전한다. 북한과 창구개설 문제 등에 따른 불협화음 같았다. 캐나다 토론토는 지난 1979년부터 해외이산가족 찾기 선봉으로 북미창구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9년 평양축전 때부터 갈리기 시작했다. 미주지역이 분리돼 나간 것이다. 89년 평양축전은 전적으로 서부(캘리포니아지역)가 북미 전체를 맡았다. 그 때문에 당시 나는 캐나다에서 LA 통협(통일협의회)을 통해 따로 방북 신청을 해야 했다. 이후 미주지역에서 동부(뉴욕)도 쪼개져 나갔다. 결국, 캐나다지역과 미 동부 및 서부 3개 지역 창구로 확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선옥 해외영접부부장 역시 미주교포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다. “우리 영접부는 조국에서 가장 많이 연료(휘발유)를 쓰는 부서로, 해외교포(이산가족이나 관광 등)들 안내를 맡고 있지요. 사업 중 일본, 중국, 러시아교포 등 다른 교포들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꼭 미주교포가 문제입니다. 한번은 미국 놈들을 욕했더니. 한 교포가 ‘자꾸 미국 놈, 미국 놈 그러지 말아요. 나도 미국 시민인데 나를 욕하는 것과 같소’ 하며 큰소리치더라고요.” 또 “미국교포는 가족 면회만 요구하고, 국가(북측)에서 준비한 다른 일정은 일체 참여하지 않아요,”하며 못 마땅해했다.

평양 통일거리 장마당 일부
평양 통일거리 장마당 일부

한번은 북경 공항에서 한 미주교포와 크게 말다툼하는 북한 공항 직원을 뜯어말린 적이 있다. 미주교포는 대기 상태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계속 순번에서 밀리자 발생한 일이었다. “당신! 얼마나 받아먹고 순서대로 안 하고 새치기시키는 거야?” 삿대질하며 큰소리를 질렀다. 그 공항 직원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동료들이나 주변에선 말리는 사람은 없고 구경꾼들뿐이다. 성이 나서 씩씩대고 싸우는 젊은 북한 직원을 옆으로 데려와 달랬다. 그는 “나는 대사관 서기관이요. 공항에 손님이 밀려 일손이 부족해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돕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어요? 어디 미국에서 막 배워갖고 와서.” (그때 북 공무원사회에도 서기관직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투던 미주교포는 나중 알고 보니 첫 방북자인 LA 목사였다.)

미주교포들은 워낙 방북 인원이 많다 보니 걔 중에는 여러 종류, 성격의 사람들이 생긴다. 이미 2천여 명의 미주교포들이 북한을 다녀왔다. 그들은 관광이든, 이산가족이든 북 어느 지역을 가든 할 말을 하고 기가 죽지 않았다. 그들 지갑 속의 두툼한 미화 때문인지. 김일성 부자 시기는 그래도 방북 분위기가 좋던 시절이다. 얘기가 다른 데로 나갔다.

북한 식량돕기(한국 곡물)

그날 밤 호텔 방에서 잠이 안 와 뒤척이다 라디오를 켰다. 방송에서는 지난 84년 9월, 북에서 한국 수재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던 예전 보도가 흘러나왔다.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남조선 구호대책으로 조선적십자사 중앙위원회에서는 5만 석의 쌀, 50만 미터의 천, 10만 톤의 시멘트를 남조선 수재민에게 보내고···” ‘아니 만 8년 전 구호 사건을 아직도 방송, 선전하고 있다니···’ 이는 예전 서울에서 발생했던 수재민을 북에서 도왔던 스토리였다. 남북 관련해 이 과거 사실을 의외로 망각한 사람들이 많다. 잠깐 이를 언급한다.

지난 1984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한국 일부 지역은 엄청난 수해 피해를 입었다. 서울, 경기, 충청지방에 내린 집중호우 때문이다. 모두 189명이 사망하고, 약 35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최악의 홍수사태였다. 서울의 경우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렸다. 이러자 북한은 며칠 뒤 남한 이재민들을 위해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남조선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10만 톤 등을 보내겠다는 공식적인 제의였다.

그때 한국은 직전 해인 1983년 10월 버마(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앙금이 채 가라앉지 않던 시점이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부는 망설이다 결국 북측의 대남제의를 받아들였다. 북한적십자사의 수해 구호물자가 9월 하순부터 5일간 판문점과 인천항 등지로 전달됐다. 한국은 답례로 담요, 카세트, 라디오, 손목시계 등 선물 가방 8백40여개를 북한에 증정했다.

북한 캐나다 식량은행(Canada Foodgrain Bank)에서 보낸 밀가루 창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을 도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한당국은 이재민 당 쌀 33kg부터 66kg까지 분배해 줬다. 북한 쌀 품질이 안 좋다느니 여러 평이 있었다. 그러나 실향민들은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등 가슴 뭉클한 반응 등 다양했다. 그때 북한적십자사의 지원은 6.25전쟁 이후 최초의 물자교류로서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다음 해 1985년에는 그간 중단됐던 남북적십자 본 회담이 재개됐고, 그해 9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산가족행사가 열렸다. 첫 고향방문단으로 일부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됐다. 그 후 다음 이산가족 상봉은 우여곡절 끝에 15년 세월이 흐른 뒤인 2000년에 가서야 다시 이루어진다. 이쯤 해 두자.

지난 2000년 김대중 정부의 대북 불법 송금 여파로 한창 시끄러울 즈음 (당시 현대 정몽헌 회장 투신자살, 임동원 국정원장, 박지원 비서실장 등 구속)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한국 언론사대표들을 초청했다. 내가 속한 강원도민일보 안형순 회장도 동참했고, 청와대 출입 기자가 없는 지방지의 신문사 대표들은 방북 참여를 위해 애쓴다고 들었다. 내 기억으론 당시 초청에 동참하지 않은 중앙지 언론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사뿐이다. (지난 11호 북에서 밝힌 한국 언론사 동참 대표들 사진 참조)

딱딱한 얘기를 더 이어나가자. 그즈음 캐나다 연방정부는 북한과 양국 간 최초 수교 문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1997년부터 캐나다는 북한에 구호기금으로 약 3천만 달러(당시 약 3백70억원)를 지원했다. 2001년 2월 초 드디어 북한과 공식 수교를 체결했다. 북한도 평양방송과 조선중앙방송 특별보도를 통해 캐나다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 주중대사(하워드 발록)는 초대 북한대사로 겸임 발령을 받았다. 이때 발록 캐나다대사를 따라 두 캐나다 신문기자 (토론토 스타와 글로브 앤드 메일)가 동행해 북한을 심층취재 했다. 두 캐나다 기자의 대북시각은 비슷했다. 양국수교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방북 후 기자들은 당시 북 실상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그때 토론토 스타 기자(아시아 지국장)의 취재 기사를 간단히 소개한다. 이미 알려진 북한 내용이지만 서방 기자로서 직접 목격한 현지 기사임에 새삼 줄여 밝힌다.

<제목: 서서히 벗겨지는 북한의 가면>

수백만의 주민들이 이 고립된 나라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고,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북 주민들은 그들 동포를 위해 눈물을 훔칠 여유가 없다. 개인숭배정치로 영생불멸의 화신이 된 김일성 주석에 대해 아직 흐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8년 전에 죽은 이 위대한 수령은 아마 무덤 속에서도 유훈 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세계 유일한 지도자일 것이다.

평양 대다수 시민은 전력난으로 난방시설을 가동할 수 없어 실내에서도 두꺼운 옷을 입고 생활하고 있다. 문을 닫은 공장이나 병원이 많고, 밤에는 도시가 칠흑처럼 어둠에 잠긴다. 이 삼엄한 국가에선 어디서나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경애하는 지도자로 지칭되는 김정일의 철권정치를 뒷받침해준다. 높이 20m의 김일성 동상 등 각종 공산주의 상징물들이 즐비한 시 전역에서, 주민들은 김일성 주석의 웃음 짓는 벽화와 자동소총을 휘두르는 군인들의 선동적인 포스터를 배경으로 땀을 흘리고 있다. 북한은 60년대 중국이나 70년대 루마니아를 연상케 한다.

북한 정부는 외국인들의 평양 외곽지대나 지방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식량부족으로 많은 주민이 굶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다. 북한에 남아있는 캐나다 구호단체의 한 관계자는 “북한 내 식량 자급자족은 불가능한 상태”라고 단정했다. 이러함에도 북한 정부는 ‘체면 차리기’에 급급하고, 곧잘 거짓 쇼를 벌였다. 최근엔 외국인들에게도 굳게 닫은 빗장을 조금씩 허용하는 듯 보인다. 북 전문가들은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세뇌교육장”이라며 “외국인 입국 허용은 북한당국의 대단한 도박”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에서 온 구호물자(쌀)
북한에서 온 구호물자(쌀)

이번 5일간의 방북 기간을 통해 2천2백만 북 주민들 생활을 들여다보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빅브라더스(Big Brothers)가 통제하는 북한판 조지 오웰 소설 ‘1984’ 세계 속 삶을 직접 목격했다···

다시 평양과 원산이다. 북한은 어려움 속에서도 해외동포들로부터 북한 투자를 받고 있었다.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해당 건물을 세우고 건물 앞에는 기부자 충성비도 세운다. 평양 여러 곳에 해외동포들의 충성비가 눈에 띈다. 주로 재일 상공인 동포(조선총련)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예전부터 통 큰 기부를 계속해 왔다. 그중 하나가 대형 볼링장(북한표기는 보링장)이다. 일본 (조)총련 여성 사장이 건립한 것으로 역시 충성비가 있고, 때마다 정기 대회가 열린다. 부근 사격장 역시 어느 해외후원자 기부금으로 건물을 만들었다. 사격장은 실내와 야외, 오락 사격장 등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산상점에서는 의외로 곰열(북한 명/웅담)을 선전하며 판매를 했다. g당 5달러다. 캐나다 가격의 절반도 안 됐다. 북에는 곰도 없을 텐데 무슨 웅담(곰열)인가. “곰열이 진짜입니까?” 접대원은 못 들었는지 가만히 있는데, 대신 미주교포가 옆에서 대답을 해줬다. “국영상점인데 당연히 진짜겠지요.” 캐나다에선 웅담 거래는 일체 엄금이고 불법이다. 언제인가 한 한인교포가 토론토 공항에서 세관원에게 걸려 5천 달러 벌금을 물었다. 신문에도 보도되고 한인 얼굴에 먹칠을 한 적도 있었다.

북한 어머니 사생대회 미술

한쪽에선 굶어 죽어가고 한쪽에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생존경쟁 장사(장마당 등)에 뛰어든 주민들은 거의 여성들이다. 중국인들은 국경을 맘대로 드나들며 돈놀이를 한다는 소문이다. 북 주민에게 물건을 대주고 장사를 시켜 가만히 앉아 이자 높게 돈을 챙긴다고 한다. 처음엔 시골 장마당 자체가 불법이었으니 만일 단속으로 뺏기게 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마치 난장판 같은 세상 속에 중국인만 북한 땅에서 떵떵거리고, 죽어나는 것은 변방의 북 주민들뿐이다. 식량난에다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전염병까지 돌아 많이들 죽었다 한다. 약이 전혀 없으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내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소련 노벨상 수상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자국민을 통렬히 비평했던 말을 기억한다. “러시아인들은 밀고, 배반, 관료 우선주의, 부패 등 많은 단점을 가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예근성, 게으름, 순종 등이 결코 러시아인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다. 그와 같은 성격은 그간 국가통치자들이 국민의 잠재력을 없애왔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공산화되고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결과다”라고 지적한다.

우리네 남북주민들을 비교하면 어떠한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피보다 진한 게 있다. 이념이다. 솔제니친은 주장한다. “이념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그 이념이 만드는 역사는 늘 폭력적이고 고통스럽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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