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3] 북미 교회 통해 북녘땅에 천문학적 돈 투입돼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3] 북미 교회 통해 북녘땅에 천문학적 돈 투입돼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2.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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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북한 구월산(황해남도) 일명 서해 금강
북한 구월산(황해남도) 일명 서해 금강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북한 주민들의 궁핍한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다. 늘 식량이 부족했다. 김대중 정부가 퍼 준 5억 달러(약 6천억 원)도 부족했는가. 만20년 전의 5억 달러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나 북한 사정이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막대한 돈이 진정 굶주리는 북 주민들보다 다른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당시 그 불법 자금이 북한 핵 개발에 쓰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것 아닌가. 어쨌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은 IMF 사태는 진정되는 국면을 맞았고, 북한은 일단 고난의 행군이 마감된 듯했다. 북한은 큰 고비는 넘긴 모양새를 보였으나 외부로부터는 지속적인 식량 원조를 받았다.

그즈음 토론토에서 캐나다 곡물은행(Canadian Foodgrains Bank)대표인 리처드 피(Fee)씨를 만났다. 그는 캐나다 장로교회 세계봉사 및 개발부 책임자이기도 했다. 북한을 4차례 방문했다는 그는 “서방국가에서 북의 핵무기개발을 이유로 식량 원조를 중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피 대표 견해는 “북한 핵무기개발 관련 건은 북측의 전쟁준비가 아닌 단지 미국 등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타협수단인 것 같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 세계 식량프로그램(World Food Program)측에서 지원예산을 삭감해 현재 북한식량문제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 봉착해 있다”고 염려했다. 또 “새벽 6시 사이렌 소리에 북한 지방 각 동네의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 8시 이후에는 거리에 단 한 명도 찾아보기 힘든 암흑도시로 변한다”면서 “북한 빌딩이나 가정에는 연료가 없어 추위를 견디며 살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 묘향산 등 김일성 돌 새김
북한 묘향산 등 김일성 돌 새김

내가 볼 때 북한은 세계 어디고 핵전문가를 끌어들이는 노력은 한시도 게을리한 적이 없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 내 모스크바 초창기 시절 북한은 경제난에 봉착한 소련 핵과학자들을 월 2천 달러에 데려간다는 러시아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또 핵보유국인 인도와 서울 대치 중인 역시 핵보유국 파키스탄의 최고 핵물리학자과 관련 얘길 들었다. 캐나다의 핵관련 전문학자들에게 접근한다는 캐나다 최고보안기관 경고도 토론토신문에서 접했다.

한국을 거쳐 토론토에 온 80대 탈북자 C씨는 난민 신청으로 단기일 만에 영주권을 딴 자칭 김일성 측근자다. 그는 “나는 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에서 죽었을 때도 함께 있었고, 수십 년간 늘 김일성 주석 옆에 있었다”며 “김일성은 50년대부터 ‘총대 끝에 핵’이라는 구호로 늘 핵 보유만 꿈꾸어 왔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또 “북한에서 핵 관련해선 극비에 속해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속한다”는 것이다. C씨 관련해선 기회 되면 따로 인터뷰한 글을 소개할 생각이다. 어쨌든 북한은 핵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삼아 오늘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그런 북한에게 무조건 핵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들이 쉽게 응할 것 같지 않다.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55년생) 얘기를 잠깐하자. 임 목사는 북한을 돕던 중 무기실형을 받고 복역하다 31개월 만에 석방돼 세상에 꽤 알려진 토론토 성직자이다. 그는 지난 96/97년부터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당시 북에서 직접 캐나다 친북대표로 임명한 70대여성(고 전충림씨 부인)을 통해서였다. 그는 북을 지속적으로 다녔다. 10여 년간 150번 이상 방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미 주 한인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대북원조금으로 수천 톤의 식량, 수만 장 이불, 겨울옷, 안경 등 각종 구호물품을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에 라면공장, 가발공장, 국수공장, 컴퓨터 학원, 학교, 양로원, 농장 등을 세웠고, 어업등 여러 부문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북한 평양 평화자동차 간판
북한 평양 평화자동차 간판

북한 경제특구인 함북 나선(나진, 선봉/옛 웅기)지구와 인근 회령, 군포 등지에도 양로원등 9개 복지건물을 건립했다. 이 지역은 1998년 토론토 큰빛교회에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 선교사로 정식 파송된 전종석 은퇴장로(25년생)가 주축이 됐다. 전 장로는 “건물만 세운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매달 운영비, 인건비, 유지비 등으로 경비가 약3천 달러씩 들어갑니다”하고 설명한다. 전 장로는 10여 년간 중국 연변지역과 북한 특구인 나선지구 지원 작업에 여생의 온 정성을 쏟고 있었다. 연길시 연평 병원 명예원장을 비롯해 북한 라진시 양로원 명예원장, 라진 원봉/군포 유치원 및 탁아소 명예원장, 원정리 탁아소, 회령 문산리 양로원 및 수북유치원 명예원장 등을 맡고 있었다. 이희아 장애인 피아니스트 (네 손가락뿐인 제1급 선천성장애인소녀)가 기증한 3천 달러 피아노도 그가 마련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현수 목사 수감 이후 북한선교일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큰 지원사업은 함북의 한 호수를 막아 농토로 만든 일이다. 이 사업은 미주교포들의 헌신적인 특별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일은 스폰서의 개발지원이 끊겨 중단되긴 했지만, 한때 함북 주민들 사이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당시 북미 교회 등지에서 임 목사를 통해 북녘땅에 투입된 돈은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러나 헌신적인 미주동포들의 후원결과는 참담했다. 임 목사는 북한 반국가 정부전복음모란 죄명으로 종신형 (무기노동교화 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캐나다정부의 줄기찬 노력 끝에 만2년7개월 만에 겨우 석방되지 않았던가. 나는 그를 만난 일도, 대화 한번 나눈 적도 없다. 다만 그가 설교를 잘한다는 소문을 간혹 들었다.

그는 교인 30여명 남짓한 개척교회(한국최초 동요작곡가 박재훈 목사가 설립한 장로교회)를 인계 맡은 지 불과 수년 만에 수천 명 신자로 만들어 토론토 최대교회로 우뚝 성장시킨 젊은 목사였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높았다. 한 예다. 한국에서 약 20년 전에 한 독실한 개신교인 K후배가 이민 왔다. 그는 한 군데 교회를 정하려 했으나 토론토교회 숫자가 워낙 많아 쉽게 결정을 못 했다. 수 개월 간 매주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며 목사설교를 듣던 중 어느 날 “형님, 이제 교회결정을 했어요”라며 밝은 모습이다. 큰빛교회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 최홍희 태권도총재 부인 역시 다니는 교회다. 그녀 역시 서너 군데 교회를 옮기다가 임 목사설교가 맘에 들었다고 했다. 솔직히 내겐 임 목사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를 만나려고 교회사무실에 남긴 두 세 차례 메시지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담임 목사라 바빠 그런지 문턱이 꽤 높게 느껴졌다.

원산 근로자들의 오후 한때
원산 근로자들의 오후 한때

하루는 K후배가 집에 놀러 왔다. 그는 내가 방북 신청할 때마다 찾아와 못 가게 말리곤 했다. 식구처럼 가까운 K는 내 방북이 늘 불안하고 맘에 걸렸나 보다. “괜찮아. 내 염려 말고 자네 교회 임 목사 걱정이나 해요, 나 같이 이름 없는 기자 나부랭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임 목사는 지금 잘나가는 것 같지만, 자칫 실수하면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어. 그때는 무슨 죄명인 줄 아나. 국가전복 음모죄야.” “형님, 나는 임 목사님이 줄곧 북한에 다니는 것도 안 좋아해요. 하지만 무슨 국가전복 음모죄?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후에 내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을 때 스스로 경악했다. 그전 연길 거주 조선족 L씨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L씨가 정색을 하고 일러준 말이다. “송 기자님, 북한 어느 고위급인물이 비밀이라며 일러준 얘기가 있어요. 제가 조선족 중국공민이라 가끔 솔직하게 털어놓고는 해요. 공화국(북한)에서 가장 위험인물은 기독교인이라는 거지요. 요놈(기독교인)들은 겉으론 선교사라는 탈을 쓰고 베풀어주는 척하면서 항상 우리가 망하기만 바라는 반동분자들로, 절대 요주의해야 할 놈들이라고 전합디다,”

북에 수년간 수십억 원 후원금을 내고 북한을 돕다가 순간적인 오해로 하루아침에 추방된 북미교포들을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나. 북한은 절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평소 아무리 억만금을 갖다줘도 한번 그들 체제를 흔든다는 의심을 받으면 끝장이다. 이 얘기는 여기서 일단 멈춘다. 글이 다소 어긋났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기왕 다른 얘기 하나를 더 붙인다. 평소 납득하지 못한 우리네 일 때문이다. 어느 국민이든, 또 죄가 있든 없든, ‘북한에 납북 또는 억류’됐을 때 그 국민이 속한 해당 국가의 태도와 역할 얘기다. 예로서 임현수 목사(캐나다 시민권자) 경우나 그전 미국 여기자들 억류 건, 진작 일본 현지에서 납북된 젊은 일본여성에 대한 해당 국가의 대응자세다.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의 자국민 구출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단 한 명 국민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구출해 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시도한다. 캐나다 연방총리이 앞장섰고, 미국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민간기까지 빌려 직접 평양까지 가서 두 여성 기자를 데려왔다.
 

일본 총리는 기회만 되면 북측이 납치한 여성귀환을 먼저 집요하게 요구하지 않았던가. 우리네 경우는 어떠한가. 오래전 국내에서 KAL기 납북 건도 영구 미해결이다. 우리 대한민국 정권이 그간 끈질기게 구출 노력을 했는지 자신할 수가 없다. 그간 좋은 기회는 늘 있었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송환, 또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무조건 송환시켰을 때다. 그때 교환조건을 내세웠다면? 남북 정상회담 등을 했을 때 납북된 우리주민들의 송환문제를 국가차원에서 거론했는지 내 기억엔 없다. 이 점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무척 아쉬웠던 점이다.

한편 1990년대 와서 북한경제력이 눈에 띠게 약화되자 북 주민들 간 성행한 것이 각종 ‘계’였다. 원래 주민들 간의 계모임은 ‘종파분자들 모임’으로 금지돼 왔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주민들의 자구책으로 이해해 북 당국에서 용인한 것 같았다. 사실 계모임은 자본주의하 한국이나 해외교포사회에서 대부분 여성들이 자주 한다. 토론토 은퇴노인들도 여행 계 등 끼리끼리 친목계를 갖는다. 노인들은 캐나다정부에서 매달 개인당 1200달러정도 받는 연금(65세 이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중간에 깨지는 경우도 봤다. 처음부터 비양심적인 사람이 끼게 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북한 계를 잠깐 알아보자. 해외영접국의 책임지도원이 들려준 얘기다. 40대 책임지도안내원은 “계모임은 근로인민들의 생활상 애로를 해결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돕는 미풍과 관련돼 있다”면서 “날이 갈수록 민간계가 보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평양 등 도시보다는 특히 시골지방 주민들이 많이 하고, 주로 여맹(여성동맹) 조직에서 계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당국에서는 그간 계에 대한 시각을 긍정적으로, 주민들의 실생활을 돕는 미풍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안내원은 “계 규모는 작으면 4-5명, 큰 계는 20-30명 이상 되는 계도 있다”고 한다. 종류도 다양하고 운영방식도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나 해외에선 계 책임자를 ‘계주’라고 부르나, 북에선 ‘계장’이나 ‘계위원장’, 또는 ‘계비서’라고 한다. 계장은 계원들(북한 명 계성원) 가운데 가장 신망 있는 사람을 선출한다. 또 계 종류는 항상 돈만을 갹출하는 현금계와 식량(쌀, 옥수수 등)계 등 둘로 나눈다. 계 날짜는 보통 한 달이나 보름 단위라 한다. 현금계는 주로 아파트나 직장단위로 조직돼 있다. 식량계는 보통 식량배급이 15일 간격으로 나오니, 일반적으로 보름단위다. 또 시골에서 닭을 키우며 인민반 이웃들끼리는 계란(달걀)계 등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계는 자본주위 체재 하에선 종종 발생하는 계 파동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인민들 생활에서 화목과 협조의 좋은 유산을 남겨놓은 민간끼리 모임’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였다.

2001년 여름 강원도 장전항에 옥외광고탑이 생겼다. 장전항은 금강산 관광의 관문이다. 자본주의 상징인 이 광고탑은 월북한 고 최덕신(전 외무부장관 역임)장남인 독일거주 최건국 사장이 사업(독일 소재 한백상사)을 맡고 있었다. 최 사장에 따르면 장전항에 확보된 두 자리중 하나는 중국 IT산업사가 계약됐고, 나머지는 외국 광고물보다 한국기업체 광고를 원한다고 했다. 고교 선배인 그는 “그런데 한국 통일원과 현대그룹에서 한국기업체의 광고탑설치를 반대하고 있어 힘드네”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옥외 광고탑 설치는 금강산 입구인 온정리 등지에도 계획돼 있었으나 결국 성공치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상업화 물결은 평양에도 들이닥쳤다. 평소 금지됐던 ‘자본주의 생활양식’이라는 국가복권까지 나타났다. 추첨제 저금(무이자)을 통해 예금자 중에서 당첨자를 추첨한다. 조선중앙 텔레비전 방송중계도 했다. 3-4년 뒤는 평양 한복판에 평화자동차 대형 광고탑이 세워졌다. 통일교(교주 문선명)에서 주축이 된 이 광고탑은 북한의 유일한 자본주의식 선전구조물이 됐다. 광고탑 모델은 당시 휘파람 노래로 일약 유명 가수가 된 전혜영이다. 통일교에서 남북합영회사로 제작(조립생산)했다. 이 평화자동차는 2002년 남포(진남포)에 공장이 세워졌고, 첫 차 이름 역시 휘파람이라고 지었다.

평양 만경대 고향집
평양 만경대 고향집

평양 취재를 계속하며 북한생활양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우선 공항의 검색이 강화되고, 내국인이 허가받지 않은 담배를 갖고 입국할 경우, 3배 관세를 부과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호텔에서는 밤 10시 이후 술을 마시는 경우 봉사료가 20% 가산됐고, 밤에 택시를 타면 요금을 3배 이상 받았다. 운전기사 (북에선 운전수라고 호칭) 맘대로 받는 것 같았다. 안내원에게 “왜 이리 택시요금이 들쑥날쑥해요?” 물었더니 자신들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한다. 안내원은 ‘박두선 애국차 봉사사업소’라는 기업체에서 10여 년간 관리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지금은 완전 달라졌다. 고려항공소속을 포함해 5개 택시회사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꽤 많이 변화됐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북한 사정이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전 일이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지난 1989년 4월 북한당국은 주민들의 주거이전 자유를 전격적으로 허용해, 깜짝 놀랐다. 평양축전 3달 전이다. 그러나 웬걸, 한 달 만에 다시 종전대로 돌려놓아 또 한 번 놀랐다. 도로 아미타불이 됐다. 어떻게 외부에 공포했던 국가법을 하루아침에 다시 바꾸나. 특히 북한 비자 발급은 늘 예측하기 힘들다. 3년 전 2월이었나 국제태권도 연맹(ITF) 리용선 총재가 토론토를 방문해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송 선생. 오는 가을 조국에서 열리는 제20회 세계 태권도대회에 오시지요?” “그래요? 그럼 북한취재를 한번 원하는 밴쿠버에 후배 부부가 있는데 함께 가도 되겠소?” “아, 그럼요. 우리 선전인데 누구든지 받아들입니다. 같이 오시라고요.”

나를 포함해 3명이 방북신청을 하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년 만에 방북을 앞둔 2주 전이다. 갑자기 ITF 연맹본부(오스트리아)에서 이메일이 왔다. “송 선생 비자발급은 불가판정”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2명 동행자는 비자발급이 통과됐다고 연락이 왔다. 이미 나는 왕복항공편까지 끊은 상태였다. 과거에도 이런 똑같은 경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상했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꼭 간다고 다짐했던 후배 부부도 안가겠다고 마음이 변했다. 김정은 정권 이후 첫 방북취재였는데 그들이 좋은 기회를 포기한 게 너무 아쉽게 생각됐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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